신정일의 '길 위에서'

“앙드레 지드는 뽕티니(Pontigny)에서 머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한 말에 대하여 아흐레 동안 충분히 되새기며 고치는 풍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 있게 의사를 밝힐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충분한 시간이 있어서 자신의 판단을 재검토 할 수 있다든지 혹은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기만 해도 다행한 일일 것이다. 유예기간을 바라는 것은 실체적 측면에서 행위를 되풀이 하는 것, 즉 뒤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이미 지나온 길을 지나오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과 흡사하다.

이처럼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은 ‘선험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으나 실제로는 우리가 행동한 것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고 이것이 쌓여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기 때문에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듯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종종 피할 수 있는 것 같은 일들이 불가피한 일로 되는 것이 불가피한 일로 되는 것을 보아왔다. 우리는 이러한 잊고 싶은 일들을 잊어버릴 수는 없지만, 반박을 통하여 이를 취소, 또는 말소시켜 버리려는 노력을 할 수는 있다. 이처럼 진실 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생이란 사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삭제하거나 가필하는 노역으로 점철된다. 이렇게 삭제와 가필로 잘못을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알베르 카뮈의 스승이자 철학자인 장 그르니에 산문집 <자유에 관하여>에 실린 글이다.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말 때문에 말이 많다. 독설과 막말이 난무하는 것을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고 넘어가기도 어렵다. “남을 해치거나 비방하는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이라는 ‘독설‘이나 “나오는 대로 속되게 하는 말”이라는 막말은 사람들에게 비수가 되고 상처를 주는 말이다.

언제 말했는지 기억 속에서도 지워졌던 본인이 했던 말이 세상에 튀어나와 곤혹을 치루는 경우가 많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은 그 말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람의 마음이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된다. 말이 절주節奏를 가지면, 가歌, 시詩, 문文, 부賦가 된다. 사방의 말은 비록 같지 않으나, 말을 할 줄 아는 자라면 각기 그 말로서 절주를 삼아, 모두들 천지를 음직이고 귀신을 통할 수 있다. 중국에서만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들은 좋은 말은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과도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나,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라는 옛 사람들의 말이 있는데, 중국의 성인 공자는 한 술 더 떴다.

“명분이 바르면 말이 순조롭다.(名正言順)”

그래,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조심하며 남은 생애를 살아야겠다. 하지만 서두에 쓴 글처럼 한 말을 재검토하는 그런 시간이 주어져 다듬어진 말만 내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2021년 12월 10일, 무주 앞섬을 흐르는 금강에서.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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