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대도’ 김일권①
중국 지린성 용정시~명동촌 중간 지점의 ‘동량리 어구’. 이곳은 1920년 1월 4일 무장독립조직 철혈광복단원 6명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일제의 만주철도 부설자금 운송차량을 습격, 거금 15만 원을 탈취했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이 사건은 2008년 7월 개봉되어 불황에 허덕이던 한국 영화계를 뜨겁게 달궜던 액션영화 <놈, 놈, 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2010년 8월 현장을 찾았을 때 가이드는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를 가리키며 “거금 탈취 기념비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며 허탈해 했다. 순간 왕년의 도루왕 김일권 선수가 생각났다. 그가 프로야구 최초로 300도루 달성하고 동료들에게 했다는 농담 중 “대한민국에서 도둑질 잘했다고 상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대목이 떠올라서였다. -기자 말-
한국 프로야구 원년(1982년) 도루왕 김일권(59). 그는 해태타이거즈(1982~1987년), 태평양돌핀스(1988~1990년), LG트윈스(1991년) 등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1982년 7월 18일 광주구장(해태-OB) 경기에서 프로야구 최초로 한 경기 개인 최다 도루(5개) 기록을 작성한다. 사흘 후(21일)에는 인천구장(해태-삼미) 경기에서 7회 초 ‘홈스틸’을 성공, 4-4 균형을 깨고 결승점을 올리는 수훈을 세운다. 이는 1982년 전게임을 통해 유일한 ‘단독 홈스틸’이기도 하다.
1983년 9월 26일 인천구장(해태-삼미) 경기에서 6회 초 안타를 치고 1루에서 2루를 훔침으로써 프로통산 최초로 100도루(1982년 53개 포함) 달성한다. 이 기록은 자신의 시즌 100번째 안타를 등에 업고 세운 기록이어서 의미를 더 했다. 이날 경기는 그의 발만큼이나 빠르게 끝나 최단시간(1시간 47분) 경기 기록을 세우기도. 종전 기록은 대전구장(삼미-OB) 경기로 1시간 52분이었다.
3년 후인 1986년 8월 21일 광주구장(해태-삼성) 경기에서 6회에 중전안타를 치고 2루를 훔쳐, 시즌 19개째 도루를 성공하면서 프로야구 최초로 통산 200도루 기원을 세운다.
1987년 7월 3일 광주구장에서 벌어진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 1회 말 공격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통렬한 만루 홈런을 터뜨려 해태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는 그의 프로야구 첫 번째 만루 홈런으로 해태가 8-6으로 승리하는 데 주역이 된다.
유니폼을 태평양 돌핀스로 바꿔 입은 1988년. 그해에는 규정타석을 채우고도 삼진을 8개밖에 당하지 않았다. 이는 프로야구 시즌 최소 삼진 기록으로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대망의 300도루는 1989년에 달성한다. 그해 9월 7일 인천구장(태평양-해태) 경기에서 5회와 7회 도루를 감행, 프로야구 최초로 300도루 기록을 작성한다. 경기 결과는 2-5, 태평양은 득점에 모두 연결된 두 개의 도루에도 불구하고 패한다. 그는 그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시즌 최다 도루(62개) 기록을 세우면서 ‘대도’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아마 시절 ‘작은 탄환’으로 불리며 한 게임 한국 최고 도루(6개) 기록을 세웠던 그는 프로통산 단독 홈스틸 두 개(1982년, 1985년)를 기록하고, 도루왕을 5회(1982년, 1983년, 1984년, 1989년, 1990년) 차지한다. 프로야구 10시즌 동안 842경기에 출장(0.253), 도루 363개의 금자탑을 쌓았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통산 364득점을 기록, 도루 성공은 대부분 득점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고교 졸업 후 해마다 태극마크 달아
김일권은 1974년 봄 군산상고를 졸업한다. 그는 그해 6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세계 아마야구선수권대회를 비롯해 1975년 몬트리올 대륙간컵 야구대회, 1976년 6월 네덜란드(할렘) 국제야구대회, 그해 12월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1977년 니카라과 마나과 경기장에서 개최된 제3회 슈퍼월드컵(대륙간컵) 야구대회 등 해마다(1974~1981년)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중심타자로 활약한다.

1978년 네덜란드 국제초청야구대회(8월 13일~21일)에 출전한 그는 대회 9일째 경기(한국-호주)에서 3회 말 솔로 홈런을 터뜨려 승리(8-3)에 불씨를 당긴다. 한국, 일본, 호주, 네덜란드, 쿠바 등 5개국이 더블리그로 겨뤘던 대회에서 한국은 쿠바에 2연승을 거두는 등 2위를 차지하였다. 한국 대표팀이 아마야구 최강으로 꼽히는 쿠바를 이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해(1978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제25회 세계선수권대회(8월 25일~9월 6일)에서도 승리의 주역이 된다. 리미니구장에서 열린 8차전(한국-니카라과). 한국은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7회까지 2-3으로 뒤졌다. 그러나 7회 말 장효조, 김재박, 배대웅의 연속 안타로 만든 1사 만루 찬스에서 주자일소 3루타를 작열시켜 전세를 5-3으로 뒤바꾼다. 이날 경기 결과는 한국의 통쾌한 역전승(6-3)으로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낸다.
당시 한국은 상위권 진입이 어려울 거라는 야구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벨기에, 캐나다, 니카라과, 일본, 이탈리아, 호주, 멕시코, 네덜란드 등을 연파하고 3위(8승 2패)에 오른다. 특히 한국은 일본을 역전승으로 물리치는데, 국제대회에서 한국이 일본을 이긴 것은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우승 이후 두 번째였다. 당시 대표팀은 두 대회를 통해 한국야구가 세계 수준이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1980년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8월 22일~9월 5일)에서 김일권은 도루 18개를 기록, 이 부문에서 세계선수권대회 신기록 보유자가 된다. 득점 부문에서도 18점을 획득 2관왕을 차지한다. 그때까지 최다 도루 기록은 파나마의 밀러(11회)와 일본의 오바(大場勝: 20회)가 세운 14개였다. 타격에서도 한국 선수 중 가장 높은 4할 7푼 6리(전체 3위에 랭크)로 주최국 일본과 공동 준우승(9승 2패)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고향 팬들은 지금도 ‘도루왕’으로 기억
1992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쌍방울레이더스 주루코치(1993~1995년), 해태타이거즈 주루코치(1996~1997년), 현대유니콘스 주루코치(1998년), 삼성라이온즈 주루코치(2002~2004년), 야구 해설위원 등을 거쳐 얼마 전 판촉물 제조업체 (주)아이케이 코스모스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김일권을 만났다.
그가 그라운드를 누비던 1980년대는 프로야구 초창기로 한 시즌 경기 횟수가 요즘보다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프로통산 도루 기록(10시즌 363개)은 2014년 3월 현재 전체 6위를 마크한다.
놀라운 것은 7위 김주찬(12시즌 329개), 8위 유지현(11시즌 296개), 9위 김재박(11시즌 284개)보다 훨씬 앞서고, 5위 이순철(14시즌 371개)과 8개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로통산 도루왕 5회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호타준족’의 대명사로 틈만 보이면 뛰었던 선수. 사람들은 그를 ‘대도(大盜)’라 부른다. 프로 원년 ‘도루왕’이라며 ‘원조 대도’라 부르기도 한다. 대도는 ‘큰 도둑’이라는 뜻. 1루에서 2루, 3루를 훔치는 모습이 도깨비처럼 날쌔다고 해서 ‘괴도’라 부르는 팬도 있다. ‘달인의 경지’에 오른 그의 주루 플레이는 관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선수 유니폼을 벗은 지 어언 23년. 지금도 고향(전북 군산) 팬들은 그를 말할 때마다 ‘도루왕’을 앞세운다.
“야구선수 김일권이말여? 왕년에 ‘도루왕’였잖여. 해태타이거즈 선수였을 때는 해마다 도루왕을 차지혔던 것으로 기억허는디… 하이간 군산상고 선수 때부터 키는 짝어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운동장을 지맘대로 날러댕기는(날아다니는) 갱까도리(날쌘돌이) 선수였지.”
“그렁게 말여, 안타든 볼넷(4구)이든 1루에만 나가믄 2루는 따 논 당상이었지. 야구장을 내 집 마당처럼 휘젓고 댕겼응게. 그려서 나는 군산상고나 해태가 지고 있을 때도 김일권이 안타를 치고 나가믄 마음이 놓였어. 무사(無死) 때 주자로 나가믄 최소한 1점은 올렸응게.”
“나는 김일권이 호랭이(해태) 유니폼 입고 금방 도루를 허는 것처럼 모숑(모션)을 쓰면서 상대 팀 투수와 포수를 놀리는 모습은 희열이라고 할까. 또 다른 재미를 느꼈지. 속이 상하다가도 도루를 성공허는 순간은 유쾌, 상쾌, 통쾌혔응게.(웃음) 내가 결혼허기 전부터 좋아혔던 선수였는디 요새는 뭐 허고 사는지 모르겠네. TV에도 안 나오고···.”
계란 노른자가 동동 떠다니는 달콤한 모닝커피 향과 예쁜 꽃무늬 커피잔이 조화를 이루는 군산의 옛날식 다방에서 만난 70~80년대 야구팬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김일권에 대한 기억들이다. “김일권 선수는 ‘군산의 자존심’이었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아저씨도 있었다. (계속)
※ 등장 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