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가을을 가을답게 보여주는 풍경 중의 하나가 들이나 산에 무리 지어서 피어 있거나 혹은 대여섯 개나 여나 문개 피어서 바람결에 온 몸을 맡기며 흔들리고 있는 억새일 것입니다.
갈꽃이라고 부르는 억새, 그 억새를 두고 송기원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갈꽃이 피면 어이 하리
함성도 없이 갈채도 없이, 산등성이에
너희들만 눈부시면 어이 하리
눈멀고 귀 멀어, 하얗게 표백되어
너희들만 나부끼면 어이 하리
아랫녘 강어귀에는 기다리는 처녀
아직껏 붉은 입술로 기다리는 처녀."

전주천에 지천으로 핀 갈꽃을 만나러 가던 길, 그 전주천, 남고산성과 승암산 일대에 산들이 오색 단풍으로 물들고, 전주천을 가로지른 청연루는 말 그대로 가을이었습니다.
고개 들어 바라보던 푸르른 하늘, 그리고 흘러가던 구름 전주천 양편으로 억새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바람결에 온몸을 내 맡겨두고 있었습니다. 흔들리고 흔들리는 억새를 바라보며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룰 수 있는 것, 별로 없다는 것을. 나도 저렇게 흔들거리는 하나의 억새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냥 운명의 바람에 순응하고 흔들려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십일월의 하루가 저물어갔습니다. 그 강물 지금도 소살소살 흐르고, 억새는 어둠 속에서 하늘거릴 테지요.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신정일 객원기자
jbsori@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