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앞산에 가을비/뒷산에 가을비//낯이 선 마을에/가을 빗소리//이렇다 할 일 없고/기인 긴 밤//모과차를 마시며/가을 빗소리
박용래 시인의 「모과차」란 시가 떠오르는 시절이다. 이런 가을이 어느새 떠나간다. 계절은 이미 가을 한복판을 지나쳐버렸다. 바야흐로 늦가을로 접어들어 끝자락을 아주 조금만 남겨놓았다. 맹렬했던 단풍 기세도 끝물이고 낙엽만 수북히 쌓여 간다.

“한계령 넘기 시작하던/ 단풍 예대로/ 새재 대재 다 넘었다”(윤사순, 「단풍」)는 언급조차도 이미 과거완료형이 됐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뭐 멀리서만 찾을 거 없이, “나뭇가지 사이로/ 잎들이 떠나가네/ 그림자 하나 눕네”(강은교, 「가을의 시」)라는 수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게 요즘이지 않은가. 아무려나, 이 때문에 매혹적인 단풍의 유혹에 자발적으로 마음을 주었거나 그 마음 추스르는 형편이다.
왠지 모르겠으나 그저 만추(晩秋)라는 말이 좋다. ‘만추’가 얼마나 매혹적인가. 이 낱말은 그저 사전 속에 머물지 않고 계절병처럼 연례행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뜨게 하지 않든가.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노랫말 덕분에 이맘때 어간이면 어김없이 불리는 어떤 유행가처럼 말이다.
그래서인가. 분명 입동이 지났고 소설이 머잖았으니 절후상 겨울에 접어들었건만 가을이 좋아서 보내주기가 싫다. 공연한 심통이겠지만 어쩌랴! 이 얄궂은 심사를. 하여 늦가을에 부리는 새퉁맞은 청승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다만 을씨년스럽고 쓸쓸한 심경을 몇 편의 시구로 애써 달래보려 한다.
사랑·미움·인생 제 나름대로 익어 어디론지 사라져 간다
만추가경(晩秋佳景)이란 말이 있다. 늦가을 아름다운 경치라하면 응당 단풍을 첫손에 꼽는다. 그래서 “서리 맞은 잎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 ”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의 산행(山行)이다. 여기서 이월의 꽃은 동백꽃을 두고 한 말이다. 붉게 물든 단풍이 동백꽃보다 더 붉다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동양에서만 단풍을 상찬하지는 않았다. 서양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도 이런 말을 했다. “낙엽이 꽃이라면 가을은 두번째 봄이다.”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번째 봄이다라는 카뮈의 글은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다’는 노자(老子)의 철학을 연상케 한다.

가벼워진다/ 바람이 진다/ 몸이 진다/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오, 이와도 같이/사랑도, 미움도, 인생도,/제 나름대로 익어서/어디로인지 사라져 간다.(마종기/「가을」)
어느덧 떨어진 낙엽이 수북히 쌓이는 것을 보니 가을이 무르익어 끝무렵에 이른 만추의 계절임을 말해준다. 가을의 뒤안길에서, 모두가 사그락거리는 낙엽길에서 만추의 정취를 만끽했을 터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계절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래서 가을은 기다림과 체념, 미련의 계절인지도 모른다.
빗소리를 따라온 가을이 빗소리에 실려 깊어가는 밤,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벌써 떠날 차비를 하는 만추다. 등불 아래 시집 한 권 펴놓고 싶어지는 밤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은 속죄와 참회, 감사와 은혜를 떠올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영혼을 구원받아야 할 속된 존재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용서와 사랑은 인간이 아니라 하늘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마종기의 가을처럼 아득한 가을은 없다. 마티스의 빛과 색이 동원되고 형님같은 미륵이 등장한다.
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주인 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개 밝히고/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오르는/화가 마티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관촉사 은진미륵, 많이 늙으신 형님.//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은 작은 꽃,/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버리지만/죽은 풀, 시든 꽃가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뜨거운 다비(茶毘)에 부처 사리나 찾아보고/연기 냄새 가볍게 품고 꽃을 떠날밖에.//저 산에 흥청이는 짚은 단풍에 비하면/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단순하다./산 너머 저 쪽빛 바다에 비하면/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니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가을, 아득한」)
그냥 편하게 흐르거나 꿈처럼 흘러가자
그래서 마종기는 「가을 수력학(水力學)」에서 세상 처세의 태도와 철학을 깨우치는지도 모른다.
그냥 흐르기로 했어./편해지기로 했어./눈총도 엽총도 없이/나이나 죽이고 반쯤은 썩기도 하면서/꿈꾸는 자의 발걸음처럼 가볍게.
//목에서도 힘을 빼고/심장에서도 힘을 빼고/먹이 찾아 헤매는 들짐승이 되거나 말거나/ 방향 없는 새들의 하늘이 되거나 말거나/ 암, 그렇고 말고,/ 천년짜리 장자(莊子)의 물이 내 옆을 흘러가네,/언제부터 발자국도 없이/타계(他界)한 꿈처럼 흘러가네.

한걸음 더 나아가 마종기는 하느님께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라며 당돌하게 캐묻는다.
해 뜨고 해 질 때까지 온종일/ 오른쪽은 왼쪽을 씹고/ 왼쪽은 오른쪽을 까고/ 대가리는 꼬리를 먹고/ 꼬리는 대가리를 치다가 죽고,/ 하루도 그치지 않은 총소리,/ 하루도 쉬지 않는 살인./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남들의 슬픔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남들이 고통 끝에 일어나면/감동하여 뒷간에서 발을 구릅니다./어느 시인이 쓴 투쟁의 노래는 용감하지만/내게 직접 그 고통이 올 때까지는/어느 시인이 쓴 위로의 노래는 비감하지만/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그러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시인의 용도」)
만추가 주는 느낌은 지극히 상반적이다. ‘결실’과 ‘쇠락’의 대척이다. 풍요와 성취의 의미가 한 편에 있다면, 다른 편에는 고독과 상실의 의미가 존재한다. 물론 정답은 없다. 양쪽 모두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감수성이 만들어낸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감정이입’이라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마음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생산적인 면을, 어떤 이들은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면을 강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만병을 통치할 금언은 그래서 약발을 얻는다. 그러니 시들고 떨어지는 것이 가을이라 생각하면 만추는 울적하고 심란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자작대는 빗소리에 바람 소리 같더니/ 돌연 솟구쳐 물결 부딪치는 소리 내다가/ 마치 파도가 밤중에 일렁이고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는 듯하고/ 사물에 부딪치는 모습은 쨍그랑쨍그랑 쇠붙이 울리는 듯한”(구양수, 「추성부」)
이치가 이럴진대 만추의 ‘쇠락’조차도 ‘끝’으로만 받아들일 일은 아닐 성싶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서정주, 「푸르른 날」) 드는 것이 단풍일지라도 그 변화를 한갓 종말의 징표로만 읽지 말 일이다. ‘지치는 것’은 다른 각도에서 곧 완숙이고 성장이다. 울다가 뿐만 아니라 웃다가도 ‘지치는’ 것이 우리네 일상 아니던가. 그러므로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서정주, 「행진곡」)이라며 삶의 고단함을 넋두리할지라도, 쇠락을 거친 뒤 재생을 준비하는 만추의 의미에는 그래도 마음을 열어둘 일이다.
몇 해 전 자신의 지론대로 무소유의 삶을 일관하다가 종국엔 몸까지 말끔히 비워버린 어느 선승이 떠오른다. 그의 말을 죽비소리로 삼을 일이다. “열린 귀는 들으리라! 한때 무성하던 것들이 져버리고만 들녘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소리 없는 소리를”(법정, 『서 있는 사람들』).
가을은 풍요로우면서 참혹한 이별의 계절
듣기 위해선 또한 그 선승의 가르침처럼 좀 더 비워야 할 터이다. 진정한 충만은 비어있음 속에 깃든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때로는 “이 좋은 가을에/ 나는 정말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여러 번 일러줬는데도/ 나무들은 물 버리느라 바쁘고/ 동네 개들도 본체만체”하는 것이 섭섭해 “소주 같은 햇빛을 사발때기로 마시며/ 코스모스 길을 어슬렁거리며”(이상국,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계절의 허허로움을 달래더라도 그 코스모스의 귀는 닮아야 한다. “바람을 떠나보내며 흔들리는 코스모스”가 “햇살의 칼로 제 몸을 저며 바람을 잊지 않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얇아진” 그 귀 말이다. 그래야만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바람을 듣고/ 흔들리지 않아도 울”(김주대, 「코스모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경리는 가을을 궁극적으로 참혹한, 이별의 계절이라고 매듭짓는다.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물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세월밖으로 내가 쫒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라간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원죄로 인한 결실이여/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가을」)
벌써 입동이 지나고 소설을 앞둬서인지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 마음이 스산해진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싸늘한 날씨에도 마음만은 따스하게 보냈으면 하고 바란다.
가을이여! 아쉽고도 서운하지만 올해는 그대를 이렇게 보내려 한다. 아름다웠으되 쓸쓸했으며 화려했으되 처연했던, 풍요로왔으면서 참혹했던, 원숙했으면서 을씨년스러웠던 가을이여! 잘 가시게나. 내년에 오는 그대의 모습은 올과는 다르겠지. 기다려보겠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네.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