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가을과 겨울 사이, 단풍과 서릿발 사이가 전국의 여러 산들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포천에서 보았던 눈쌓인 산이 마치 알프스 같았는데, 장수도 설악산도 눈빛이 한창이라고 하고, 그러나 아직도 여러 지방에서는 가을이 먼 듯 푸른빛의 단풍이 한창입니다.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누우면 눈앞에 아른거리던 온갖 풍경과 사람들, 옛 사람들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어떤 생각을 하면서 보냈을까요?

“요즘 병이 잦아 늘 누워 있노라니 침상에는 먼지를 닦지 못하고 문 앞의 이끼를 쓸지 못하면서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한 손님이 찾아와서 단풍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전해주기에 동자(童子)를 시켜 남쪽 창문을 열어보니,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나무들은 노란빛이 태반이었고, 붉은 빛도 빽빽하더군. 가만히 날짜를 헤아려보니 중양(重陽)을 지난 지가 이미 나흘째라 아우의 병이 이처럼 오래되었나 하고 느껴지더군. 

억지로 일어나 정원을 거닐다 보니, 가을기운이 차갑게 얼굴을 스치고 가을 감정이 은은히 마음속으로 움직여오더군. 들판의 소슬(蕭瑟)함과 초목의 요락(搖落)함과 풍색(風色)의 쟁영(崢嶸)함과 연광(烟光)의 담박함이 모두 사람의 비탄을 환기 시키고 또 사람의 지기(志氣)를 발산시키었네. 서재로 돌아와 누웠으니, 슬픔도 기쁨도 아니면서 마음이 어수선하고 생각이 흔들리어 누웠어도 앉았어도 불안하기만 하고, 글을 읽어도 시를 읊어도 불안하기만 하였네.

말하지도 웃지도 않고 망연히 도취되어 있는 사이에 일신의 병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니, 작비암(昨非菴)의 ‘일편 가을산이 능히 병든 나그네(병객病客)를 치료한다.’는 기록이 바로 이 경지인가 보네.

삼청(三淸)을 찾아 노닐자는 약속이 지금까지 지연된 것은 아우의 신병 때문이었네. 가을이 아직 늦지 않았고 병이 이제 나았으니, 무르익은 가을 풍경을 단 하루라도 헛되이 보내는 것이 한 가지 애석한 일이고, 사람이 몸이 성하기를 늘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두 가지 애석한 일이오. 내일 바로 찾아가겠으니 형이 능히 복건과 망혜(芒鞋)차림으로 아우를 이끌고 가주겠는가?“

증약(曾若) 윤가기(尹可氣)가 하녀에게 심부름을 보내 이덕무에게 전해준 편지입니다. 몸이 아프면 세상의 별천지도 그림책에 불과하고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계절이 내 곁에 머무는 시간도 알지 못하고 보내는 때가 더 많습니다.

단풍의 남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니 가을이 현란하게 손짓하는 곳으로 어서 달려가지 않으실런지요.

부안 내소사 들목에서.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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