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를 아는가. 이해인 수녀는 ‘가을이 아름다운 건’이란 시에서 그 답을 내놓는다.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 여름 헤매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 익어갈 때/ 몇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뒹구는 낙엽이여// 아,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리의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다운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리”
이해인 수녀는 또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가을편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축복 가을이여’(가을편지2)라고 가을을 예찬했다.
‘가을편지’는 이해인 수녀의 대표작이자 신앙, 기도, 자연관, 인생, 시작(詩作)을 노래한 백과사전이나 다름없다.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 깊어지는 가을
1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이십 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 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을.
13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4
숲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아무도 그의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해본 적이 있습니다.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15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16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처럼 넓혀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20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21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스럽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합니다.
시(詩)도 못 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을날, 초승달에서 차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22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 냅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월은 떠나가도 갈 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23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화 빛 새 옷 입고, 석류 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 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 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 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24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에게 모든 걸 드렸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27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겨도 그저 은혜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28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핼쑥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 데도 업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한 켤레의 고독을 신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29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 버리는 나의 마음을 창 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3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원정(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사랑의 비법(秘法)을 들려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 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가을 편지는 신앙과 자연 공부 깊게 만들어
‘가을’과 ‘편지’는 썩 궁합이 잘 맞는다. 그래서 많은 문사들이 너도나도 ‘가을 편지’를 들먹이며 영탄했을 터다. 앤솔로지 에디터들은 또 연서나 시문 편집에 얼마나 들뜬 가슴이 되던가.
가을이 깊어지면 비록 문사가 아닐지라도 책상 서랍에서 뒹구는 연필을 굳이 새롭게 깎아 정성껏 다듬은 뒤에 누구에게 부칠지도 모르는 편지를 써볼 심산으로 마음이 설렌 적이 있을 거다. 굳이 수신인이 없다면 자신에게 써도 좋다. 내게 쓰는 수상이거나 참회의 글인들 어떠리.
이해인 수녀처럼 깊은 신앙과 자연탐구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빠져 봄직한 애호의 대상이 가을 편지다.
도토리만 한 꿈 한 알/ 밤 한 톨만 한 기도 한 알/ 가슴에 품고/ 길을 가면// 황금빛 벼이삭은/ 바다에 출렁이고/ 단풍숲은 불타며/ 온 천지에 일어서고/ 하늘에선 흰 구름이/ 큰 잔치를 준비하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축복/ 가을이여, 사랑이여(가을 편지2)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새소리를 들으며/ 흰 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가을 편지)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가을 편지3)
바람에 실려오는 자연의 말에도 귀 기울이며 또렷해진 귀뚜리 소리에도 자연의 섭리를 새겨보는 계절이 가을이다. 산길을 걷다가 툭 떨어지는 도토리 한 알 속에도 거대한 참나무 한그루가 들어있음을 깨우친다. 그것이 가을이다.
어느 계절을 막론하고 만만하게, 수월하게 보낸 적이 있을까만, 유달리 이 가을이라는 계절은 다른 때와 견줘볼 때 아쉬움도 미련도 퍽 많이 남게 된다.
그래서인가. 모두가 마지막 남겨진 내 영혼의 소리에서 짐짓 가을을 되새김한다. 어차피 사람은 그렇게 산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믿으며 사는 것이다.
도토리 한 알에 거대한 참나무 한 그루 들어있음을 깨우치는 가을
아침 저녁으로 가을색이 짙어간다. 그럴수록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왜 쓸쓸해지는 걸까. 쓸쓸하다는 것이 슬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마음에 찬바람이 불어와 가슴을 여미고픈 심경이 된다는 거다. 그리고 누군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뜻에나 가까울까. 아니다. 길가에 11월의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진 잎사귀들을 보며 혼자서 한없이 걷고픈 것도 쓸쓸함의 한 부분이다.
찬바람이 불고 가을이 깊어간다. 늘상 똑같은 날들인데 계절이 달라진다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사람의 변덕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자연의 운행에 공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문득 아침 길을 걷다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은행잎들에게 안쓰럽다거나 가여움을 느낀다면 쓸쓸한 거다. 허전하면서도 가슴 깊이 스며드는 그리움, 안타까움, 허무함 그리고 그에 따른 이야기들이 숱하게 돋아나는 계절이 가을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사람들은 쓸쓸함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이해인 시인은 ‘11월의 나무처럼’에서 쓸쓸함을 짚어낸다.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 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라고.
꽃은 짧게 피었다가 시들지만, 피어 있는 동안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삶도 마찬가지인듯싶다. 삶이란 본시 유한한 것. 그렇기에 근원적으로 허무하고 쓸쓸하다. 한때는 세상을 휘어잡던 명민한 사람이라 해서 영원히 푸르고 싱싱하든가. 어깨가 구부정해지고 치매에 걸려 멍한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평생 권력과 출세를 추구하던 사람의 쓸쓸한 노년도 그렇다. 아무리 백세까지 산다고 한들 전성기는 짧다. 짧은 인생이기에 삶의 순간들은 아름답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찬란하게 빛난다. 삶을 미분하면 찰나의 순간만이 남고, 아름다움은 그 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다들 쓸쓸하다 못해 허허로움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모양이다.
시와 언어와 자연속에서 기쁨을 찾고 기도와 신앙으로 쓸쓸할 틈이 없다는 이해인 수녀의 마음가짐에 비할 수는 없겠으나 삶의 쓸쓸함을 극복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자신만이 갖는 인생의 가치’다. 우리는 흔히 현실과 남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적 가치와 영혼의 목소리다.
사랑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해 한다
들이나 산에 서글프게 각인되는 가을 자취가 우리를 너무도 쓸쓸하게 한다. 잊고 살았던 가을의 기억들이 새삼 떠오르게 되면, 우리네 가슴을 쿡쿡 찌르며 가을은 눈물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가을엔 이별이 많다. 가을은 사연의 계절이다. 그렇다고 그저 한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기분만으로 이 계절을 살아가라는 법은 없다. 가을에는 무조건 서글퍼야 하고, 고독감에 빠져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어차피 붙잡아도 떠날 가을인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다시 찾아올 가을인 것을, 마치 삶에서 마지막 가을처럼 보내겠다는 듯 전전긍긍하는 것이 우리네 심성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계절의 진가가 어찌 가을뿐이랴. 봄, 여름, 겨울 모두 저마다의 의미와 값이 있는 것을.
지금은 가을의 끝이다. 가을이 영글어 무르익은 늦가을이다. 돌아보니 이미 코스모스도, 구절초도 시들어 얼마 남지 않았고,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도 그쳤다. 단풍도, 억새도, 낙엽도, 눈과 마음과 발로 충분하게 누렸다. 누릴 만큼 누려야 더 가을답다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코로나와의 끝 모를 줄다리기에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때문에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고 두 손 들 만큼 녹초가 돼버렸다. 그러자 생각해낸 꾀가 ‘위드코로나’일 거다. 뭐 방역측면에서야 꼭 그렇지는 않겠으나 사람들 마음만큼은 그렇겠다는 말이다. 고약하지만 그 저주스런 역귀와 함께 간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일상의 회복이 코로나 이전처럼 완전히 자유롭진 않을 터다. 다만 조금씩 우리를 얽매었던 삶의 족쇄가 풀어질 차비를 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조짐은 너무 늦었다 해도 그나마 다행스럽다.
어쩌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변화와 변화하는 그 모습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늘도 변화가 있고 계절도 변화가 있듯이 우리 삶도 변화의 희망이 있게 마련이다. 변화의 희망을 품어내는 게 우리들 마음일진대, 그런 마음들이 어울려 희망을 키워가는 삶이 된다면 좋으리라.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이 계절의 한 순간, 순간들을 사랑과 희망으로 충만하게 채워간다면 더없이 좋겠다. 쓸쓸하지 않게 가을을 나기 위한 조건이다. 바로 가을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