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부안 격포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 왕등도에 비가 내렸고 바람이 불었다. 

작고 아담한 섬. 한 때는 오십여 가구가 살았고, 그 이전에 이 섬에 들어왔던 사람이 개화를 부정해서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었던 간재 전우 선생이다.

가인 김병로. 윤제술과 송성용을 비롯한 3,000여명의 제자를 배출한 그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 섬으로 들어와 삼년을 머물렀다. 그때 전국에 흩어져 있던 제자들이 작은 돛단배에 몸을 싣고 스승을 뵙기 위해 줄을 이었다니.

1912년에 부안의 계화도로 나간 그는 그가 머물던 섬과 중화를 잇겠다는 뜻으로 계화도로 바꾸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가 머문 곳에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비석 하나 세워져 있고 스치는 바람이 그 시절의 일을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 사람들은 하나 둘씩 이 섬을 떠나갔고 이 섬을 지키는 사람은 이제 겨우 두 사람 뿐이다. 

이 마을이 고향이세요? 

예.

계속 이 마을에 사셨어요?

아니요. 스물 한 살에 뭍으로 시집 갔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서른 일곱에 아들 세명만 남겨두고 남편이 병사한 뒤 모진 세월을 사셨다는 77세의 '서앵순'이라는 이름의 여인. 그래도 4,000 여평의 땅이 있어서 그곳에 채소도 심고. 고구마도 심었단다.

땅 부자시네요.

무슨 부자. 땅 값이 똥값인디, 세금이 많이 올랐어요. 만 사천원 냈다는데. 며느리 말로 이번에는 이만 원을 냈다는가봐요.

왕등도에서 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즐거운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긋지긋해요.

고향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솟아나는 것이 고향인데, 그럴 것이다. 그 지난했던 세월을 어느 누가 알 수 있으랴, 방목하는 염소들과 개 두 마리. 고양이 한 마리. 리고 바람과 구름과 파도 소리가 동무 하는 섬.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난 뒤 의자왕의 아들 풍왕이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올랐기 때문에 왕등도란 이름이 붙었다는 섬,밤새 창문 너머로 포효 하던 파도소리도 잠잠한 이 새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도 정확하게 답을 내리지 못 하는 나. 삶은 견디고 또 견디며 살다 사라지는 것, 내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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