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아마 옥봉 백광훈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는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그는 사암 박순의 문인으로 당나라의 시풍에 정통하였다. 선조 5년(1572년)에는 포의(布衣, 벼슬 없는 선비)로서 제술관(製述官)에 발탁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정도였다.

세상 사람들은 고죽 최경창, 손곡 이달과 함께 그를 일컬어, ‘삼당시인 三唐詩人’이라 하였다. 그들 세 선비가 지은 당풍의 한시는 격조가 매우 높아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옥봉 백광훈은 한 평생 시학만을 연구한 것으로 정평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는 마음이 상하고 눈이 멀 정도로 열심히 시를 전공하였다[劌心鉥目]"라는 평이 후세에 남았을까.

힘써 노력한 끝에 좋은 시구 한 개라도 얻으면, 백광훈은 뛸뜻이 기뻐하며 밥 먹는 것까지 잊었다고 한다. 오직 시만을 사랑하여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누구를 탓하는 법이 없었다. 백광훈은 글씨에도 뛰어나 왕희지나 왕헌지를 방불케 하는 멋진 솜씨를 갖추었다.

어느 때였던가. 남원 광한루에 오른 백광훈이 일필휘지의 기세로 시 한 편을 지었다. 다행히도 이 시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한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호남 내륙의 대도회였던 남원에 모여 과거시험(1차)을 치른 뒤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여러 선비와 석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것이다. 아무리 하여도 끝내 합격하기 어려운 과거 시험이라, 선비의 고달픈 심경이 행간에 어른거린다. 세상사를 가벼이 여기면서도 아주 떨구지 못하는 고뇌가 작품 전반에 고요히 흐른다.

그림 같은 난간에 기대어 서쪽 호수 바라보니, 

푸른 개구리밥 물결일세. 

끝없는 석별의 정한으로 하루 해도 뉘엿뉘엿 향기롭고 꽃다운 풀이여,

어느 때나 우리 여행 멈추려나 청산은 어디라도 흰 구름 많다 하네.

畫欄西畔綠蘋波 無限離情日欲斜 芳草幾時行路盡 靑山何處白雲多

외로운 이 배는 밤마다 큰 바다로 나아간다오. 

삼월 안개 낄 때면 궁궐에도 꽃 피겠지

술 단지는 금세 텅 비고 사람들도 금세 흩어진다오. 

들새 울음 소리는 원망하는 듯, 노래하는 듯 하구려.

孤舟夢裏滄溟事 三月煙中上苑花 樽酒易傾人易散 野禽如怨又如歌

※출처: 백승종,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