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세종은 백성이 글을 배우면 세상이 문명화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떠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민본’이니 ‘훈민’이라는 상투적인 용어로, 그의 한글창제를 간단히 설명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사안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문명화” 즉 성리학적 전환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세종이 이러한 평생 사업을 세우게 된 데는 그의 독서체험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왕은 탁월한 역사가이자 고아한 성리철학자였다. 그는 눈앞에 놓인 복잡한 난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슨 문제든지 역사서적을 뒤적여서 비슷한 사례를 조사하면 적절한 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극히 낙관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할 수는 없는 법이어서, 왕도 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소학>>에 따르면 태평성대에는 모든 남자아이가 소학(小學)이란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세종은 그러한 보편 교육의 이상을 가슴 깊이 품었고, 한글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하였다. 15세기 조선의 현실에 사로잡힌 신하들로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왕의 한글 창제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이야기는 잘 알려진 편이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대목도 있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를 역사적으로 검토하면서, 나는 특히 다음의 네 가지에 주목했다.

첫째, 왕은 평범한 백성도 교육을 받으면 달라진다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이런 신념이 강했기에 그는 창제의 모든 과정을 자기 스스로 주관하였다. 둘째, 창제의 과정에서 세종은 국내외의 ‘문화 자본’을 종합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들뿐만 아니라 유능한 왕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또, 명나라의 음운학자까지도 사업에 끌어들은 셈이었다. 셋째, 세종은 창제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고자 노력하였다. 반대파의 논리에 귀를 기울였고, 이치에 따라 반박할 망정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끝으로, 세종은 한글의 용도를 다방면으로 시험하였다. 이런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못했는데, 만약 세종이 십년쯤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랬더라면 한글이 다각도로 사용되어 조선 사회가 크게 변모했을 줄로 믿는다. 물론 역사에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도 싶다.

한글은 어느 누가 보아도 독창적인 문자이다. 세종은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예부터 전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기는 하다. “일찍이 세종(‘장헌대왕’)께서 화장실에서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하는 막대(‘廁籌’)를 가지고 이리저리 배열해보다가 문득 깨침을 얻으셨다.”(이덕무, <청장관전서>, 제54권, “훈민정음”)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왕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글 창제에 고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일단 한글의 모양이 대강이나마 만들어지자, 왕은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연구가 본격적으로 뒤따라야한다고 보았다.

학자 왕다운 판단이었다. 그는 궐내에 ‘한글(언문)청’을 설치하고(어떤 기록에는 ‘의사청(議事廳)’이라 했다), 집현전 학사 신숙주ㆍ성삼문ㆍ최항 등 6인을 초빙해 창제 작업을 돕게 했다(세종 26년 2월 16일).

학사들은 한글로 한자의 음가도 정확히 표기할 방법을 연구했고, 한자로 쓰지 못하는 일상의 모든 낱말을 기록하는 법도 시험하였다. 원나라 때부터 중국에서는 한자를 음운에 따라 분류한 자전(字典)을 편찬했는데, 거기 수록된 모든 한자의 음을 외국인인 우리가 정확히 아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글이 있으므로, 원나라의 운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曾擧要)>>와 명나라의 운서 《홍무정운》도 음가를 정확히 표기할 희망이 생겼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 6인에 더하여, 동궁의 학업을 보좌하는 서연관(書筵官, 총 10명) 중에서도 2-4명을 차출하여 창제 작업을 지원하게 했다(세종 29년 11월 14일, 이석형의 주장).

조선 최고의 인재 10명쯤이 왕명을 받들어 수년간 한글 사업에 매진하였다. 사업을 완결하기 위해서 세종은 명나라 최고의 음운학자 황찬(黃瓚)까지 끌어들였다. 마침 황찬은 요동에 귀양 중이었는데, 왕은 성삼문과 신숙주 등을 보내어 음운에 관한 궁금증을 모두 풀었다.

세종 26년부터 3년 동안 성삼문 등은 13차례나 요동을 왕복하며 <<홍무정운>>의 음가 표기를 마무리했다. 재위 기간중에 창제 사업을 매듭짓기 위해서, 세종은 왕실의 인적 자원도 총동원하였다. 글에 밝은 동궁(문종)과 진양대군 이유(세조), 그리고 안평대군 이용 역시 이 사업에 참여했다.

왕자와 학사들은 한글에 관련된 사항이면 무엇이든 연구했고, 세종에게 일일이 아뢰어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속설에 따르면, 공주와 승려도 이 사업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직은 없다.

여하튼 세종이 국내외의 ‘문화 자본’을 총동원하여 창제사업을 펼쳤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왕은 궐내의 벼슬아치(‘吏輩’) 10여 명에게 최우선적으로 한글을 가르쳤다(세종 26년 2월 20일).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인데, 왕은 한글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궁중에서 시범사업까지 벌였던 것이다.

누구나 아는 대로 한글은 세계역사상 가장 늦게 등장한 표기방식인 셈이었으나, 그 수준은 세계 최고였으니 실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

세종 28년(1446) 3월, 소헌왕후(1395-1446)가 세상을 떴다. 왕비의 넋을 위로하는 뜻에서 왕은 몸소 찬불가를 지었는데, 한글로 쓴 <<월인천강지곡>> 3권(보물 제 398호)이 그것이다. 또, 왕은 둘째아들 진양대군(세조)에게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보물 제 523호)을 역시 한글로 완성하게 하였다.

<<실록>>에는 왕과 대군이 한글로 2종의 책자를 저술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왕실차원에서 한글로 소헌왕후의 추모 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점은 기억해야할 일이다. 한글을 정식으로 반포한 다음에는 공식문서도 왕은 한글로 작성하였다.

대간이 죄를 짓자 세종은 그들을 질책하는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였다(세종 28년 10월 10일). 지엄한 통치문서를 왕이 직접 한글로 기록했다는 점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로써 중추적인 권력기관 사람들은 모두 서둘러 한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시절 고관들 가운데는 이미 한글을 익힌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 등이 궁지에 몰린 대간을 극구 변호했을 때, 수양대군은 세종이 의금부에 보낸 한글 문서를 꺼내보였다. 그러자 이계전 등은 그 문서를 읽고나서, “대간은 나랏 일을 의논한 것뿐이옵니다. 만약 그들을 처벌하신다면, 앞으로는 당연히 아뢰어야 할 일도 감히 거론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세종 28년 10월 10일).

이계전 등 대신들은 즉석에서 거침 없이 한글문서를 읽고 대응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세종은 한글문서를 이용해서 통치활동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좌의정 하연 앞에 두어 장의 한글문서를 펼쳐놓고 비밀리에 국사를 논의하였다(세종 30년 7월 27일).

왕은 한글이 국가통치에 긴요한 문서를 생산하는데 아무런 손색도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을 두루 감안하면, 왕이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시험(‘취재’)에 한글 능력시험을 포함시킨 것은 외려 당연한 일이었다. 

왕은 임용후보자들에게 《훈민정음》을 시험치게 하라며, “문법(‘의리’)은 통달하지 못하더라도 글자를 조합하는 능력(‘合字’)이 있는 사람으로 선발하라.”고 요구했다(세종 28년 12월 26일).

한글에 거는 왕의 기대는 무척 컸다.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서도 보았듯, 세종은 유교 경전도 장차 한글로 번역하여 백성의 경전 공부를 돕고자 하였다. 실제로도 그는 경전에 조예가 깊은 집현전 직제학 김문에게 명하여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한글로 번역하게 했다.

불행히도 그가 중풍으로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사업은 차질을 빚었다(세종 30년 3월 13일). 세종은 김문의 후임으로 김구를 선발하여 사서의 번역 작업을 계속하였다(세종 30년 3월 28일).

'세종의 선택'(백승종 저, 사우, 2021) 
'세종의 선택'(백승종 저, 사우, 2021)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태 뒤에는 세종 자신이 세상을 뜨고 말아, 유교경전의 번역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 사업은 지지부진하여 결국 150년 가량이나 세월을 끌다가 선조 때 가까스로 마무리되었다. 세종이 몇 해만 더 살았더라면 결과가 싹 달라질 수도 있었을 터라서 아쉬움이 더욱 크다.

세종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늦은 16세기에 유럽에서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어 성경을 내놓으며, 신의 말씀은 라틴어로만 전해진다는 통념에 도전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시 라틴어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국어로 문학작품을 썼다. 시간이 흐르자 더 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이에 합세했다.

유럽에는 생기발랄한 모국어의 장점을 살린 문화가 융성했다. 그렇게 이룩된 유럽 근대문명이 19세기 말부터 전세계를 석권하였다. 만약 우리도 세종의 정신을 본받아 자국어를 중심으로 문화를 발전시켰더라면 어땠을까. 그 점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쉬움을 떨치기 어려운 심정이다.

세종은 후대의 왕들도 자신을 본받아서 한글 보급에 힘쓰기를 바랐다. 어린 왕세손(단종)이 공부를 시작할 때가 되자, 세종은 집현전 학사 박팽년에게 지시하여 <<동국정운>>을 곁에 두고 《소학》을 배우게 했다(세종 30년 9월 13일).

《동국정운》이 반포되기 한달 전의 일이었다. 한글로 표기된 한자 음을 조금씩 익히는 가운데 세손은 <<소학>>의 정신은 물론 한글의 효용도 저절로 깨치기를 바란 것이었다. 세종의 깊은 뜻이 우리의 가슴에 와닿는다. 이처럼 세종은 사후에도 한글을 통해 조선이 문명적 전환을 이루기를 소망하였다.

※출처: 백승종, <<세종의 선택>>(사우, 2021)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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