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동학정신' 헌법 전문 반영 주장, 속내와 우려
지난 18일 전국 시·도지사 15명이 '5ㆍ18 40주년'을 맞는 광주에 모두 모였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국 시·도지사 제45차 총회를 열기 위해서다.
이들은 이날 '21대 국회에 바라는 대한민국 시·도지사 대국회 공동성명서'를 발표해 이목을 끌었다. 시·도지사들은 "헌법 개정을 논의할 시 헌법 전문에 대구 2·28민주운동을 비롯해 광주 5·18민주화운동, 부마민주항쟁, 동학농민혁명의 이념을 명시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이 같은 내용은 당초 총회 안건에는 없었지만 시·도지사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권영진 대구시장이 즉석에서 제안했고, 이를 다른 시도지사들이 흔쾌히 수락했다"고 영남일보는 보도했다. 대구지역 신문과 방송은 "이날 대구시장이 제안한 2·28민주운동 정신의 헌법 게재안은 대국회 공동성명서 내용에도 채택됐다"며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전북지역에서는 송하진 전북도지와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지역언론의 스포트라이 세례를 받았다.
공동성명서 안에는 송 지사가 제시한 ‘동학농민혁명 정신 반영’이 담겼기 때문이다. 송 지사는 "21대 국회에서 헌법 개정논의 시 동학농민혁명 이념이 반드시 헌법 전문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북지역 언론들은 일제히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영상과 지면에 클로즈업시켰다. 특히 송 지사가 발언한 “동학농민혁명은 항일운동,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행, 촛불 시민혁명의 모태로서 중요한 사회적 의의가 있다”며 “앞으로 헌법 개정 논의가 이뤄질 경우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담겨야한다”는 내용이 큼지막하게 부각시켰다.
"송 지사는 평소에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시작점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강조해왔다"는 낯뜨거운 표현들도 눈에 띄었다.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에 담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자 송 지사는 물론 참석한 다른 지역 단체장들도 이 기회를 빌어 자신의 소신을 밝힌 것으로 읽힌다.
문재인 정부가 발의하지 않은 동학농민혁명 정신, 송하진 도지사가 제안, 왜?
좋은 발상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을 하게 된 속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우려되는 대목은 그동안 수 차례 제기돼 왔던 내용이지만 반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정치적으로 동학정신이 훼손되지 않을까 노파심이 앞선다.
그래서다. 그간 진행돼 왔던 동학농민혁명 정신 헌법 전문 반영 움직임과 진행 상황, 전망을 다시 한번 짚어 보기로 하자. 잘 알려졌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시대에 일어났고,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바탕이 된 동학 역시 조선시대에 창도되었다. 즉, 동학의 창도와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이후 항일의병전쟁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나아가 해방 이후 민주자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최근에 일어난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따라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주도하는 헌법 전문에 동학농민혁명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학계를 중심으로 일어 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국 시·도지사협의회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됐다는 점이 특이하다.
바로 전날 “518 민주화운동 정신이 헌법 전문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이 나오자마자, 발 빠르게 송하진 전북도지사가 ‘동학농민혁명 정신 헌법 전문 반영’을 제안하고 그 내용이 공동성명서에 포함됐다. 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전북지역 언론사들은 송 지사 제안을 일제히 무비판적으로 받아 썼다.

그러나 언론의 앞서간 반응과는 달리 오히려 학계를 중심으로 일각에선 좀 더 신중한 판단이 요구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비록 좌절되었지만 문재인 정부가 지난 2018년 헌법 개헌안을 발의할 당시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당시 주목됐던 점은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과 시민혁명 정신을 담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부마항쟁, 6․10민주화항쟁 등을 포함한 반면에 동학농민혁명은 포함하지 않았다. 현 정권의 탄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촛불혁명은 진행형이라는 이유로 제외시켰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만큼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법학 전문가들도 촛불혁명이 동학농민혁명과 맞닿아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헌법 전문에 담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견해를 밝히지 않는다. 의견이 엇갈리는 형국이다. 이를 문재인 정부가 모를 리 없다.
그간 문재인 정부의 대내외 정책이나 실천의지를 볼 때, 동학농민혁명 정신과 촛불혁명의 핵심이 바로 인권(人權)과 민권(民權)과 민주주의이고 자주화라는 점을 읽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번 발의한 헌법 전문에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포함하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정 이후 발생한 국민 저항권ㆍ시민혁명, 헌법 전문에 담아
이와 관련해서 그동안 논의되고 검증된 자료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1948년 제정되었고, 지난 1988년에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3․1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의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번 개헌안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민의 저항권과 시민혁명 정신을 담고 있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부마항쟁, 6․10민주화항쟁을 포함하였다.
따라서 좀 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3․1운동’ 이전, 즉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민족이 삶의 가치 기준으로 삼았던 홍익인간(弘益人間)이나 제세이화(濟世理化) 등 숭고한 이념과 가치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이전의 일제강점기와 대한제국, 그리고 조선과 고려 등 연속성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창조해 낸 그 많은 가치들을 모두 다 포함시킬 수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예컨대, 동학농민군이 실현하고자 했던 만민이 평등한 민주사회는 동학의 정수(精髓)이고, 반외세 민족자주화는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숱하게 일어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관군과 의병전쟁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1860년에 창도된 후 1894년에 사회개혁과 민족자주화를 외치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물론 그 이후 정묘호란 등 국가의 위기 때마다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내던지며 산화해 간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 역시 포함시켜야 된다.
동학농민혁명 정신, 정치적 악용은 더 이상 안 돼...전국화·세계화 우선
둘째, 고려와 조선의 건국은 우리 민족 내부의 왕조 교체였다. 그러나 조선의 멸망으로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라는 나라 없는 국민으로 살았고, 한편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와 폭압을 뚫고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전국에서 온 국민이 동시에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사건이 ‘3․1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제국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옥동자를 낳았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에 ‘3․1독립만세운동’이 포함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다고 헌법 전문에 포함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사상과 이념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지 정해놓은 답은 없다. 그러나 국가의 건국이념을 담고 있는 헌법 전문에 포함될 수 있는 내용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처럼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는 더욱 그러하다. 그간 동학농민혁명을 둘러싼 각 지역 간 지엽적 시각과 주장들이 전국화와 세계화를 향해 나가야 할 동학정신의 발목을 붙잡았다.
누구보다 이러한 배경을 송하진 도지사가 모를리 없을 것이다. 전국화와 세계화가 거론되면 외면하다시피 했던 시ㆍ도지사들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할 것을 광주에서 긴급 제안한 것은 '포퓰리즘적 발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헌법 전문에 포함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헌법 전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동안 어렵게 공들여 국가 기념일로 제정해 놓은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다. 숭고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특정인이나 특정세력의 이해관계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그간 정치적으로 악용돼 온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다.
/박주현 대표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