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문장의 역사에서 목은 이색(1328-1396)의 위치는 위대하였다. 그는 14세기 후반의 최고 지식인이요, 시문의 대가였다. 성리학에도 정통하여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중추적 역할을 맡았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 양촌 권근 등 그의 제자들이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운명을 좌우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색과 그의 제자들은 최고의 인재로서 서로 친하게 지내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곧 세상이 달라졌다. 공양왕 1년(1389)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조정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우왕이 축출되고 창왕이 들어섰고, 그 이듬해 이성계는 구 귀족세력의 상징인 이색을 조정에서 몰아냈다. 공양왕 3년(1391) 이색은 경상도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유폐되자 그는 깊은 위기를 느꼈다. 왕조의 안녕과 신변의 안전을 염려하며 이색은 연달아 세 장의 편지를 썼다. 우선 자신의 수제자이자 정치적으로도 가까웠던 정몽주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정적이 되고만 옛 친구 이성계며 갈라선 제자 정도전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이색의 시 편지는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의 역사가 웅변하듯 그들의 운명은 강파르게 극과 극으로 치달았다.
역사의 임계점에서 이색이 보낸 시 편지라. 그것을 꺼내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따로 길게 주석을 붙일 필요도 없이 술술 읽힐는지도 모른다. 과연 14세기의 지성인 목은 선생은 편지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랑하는 제자 정몽주에게
그동안 도성(개경)에서 잠시 분주하였지요 向來京輦蹔奔波
직책대로 과전을 받다 보니 엉뚱하게 너무 많이 받았든가 봅니다 職貽科田誤我多
벼슬을 내려놓으니 정말 가슴이 시원하답니다 一箇白丁眞灑落
천 년 전 ‘자지가’에 답하고 싶을 정도지요 欲賡千載紫芝歌
시 편지에 나오는 ‘자지가(紫芝歌)’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지란 영지버섯이다. 중국 고대에 상산사호(商山四皓)란 선비가 있었는데, 진시황제의 학정을 피해 남전산(藍田山)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가 은거 중에 지은 노래가 바로 ‘자지가’였다. 그렇다면 이색은 여말의 난세를 피해 어디론가 숨고 싶은 심정이라고 제자에게 고백한 셈인가. 이색이 포은에게 보낸 시 편지의 제1련은 그러하였다. 수제자 정몽주를 향한 스승의 편지는 이색의 문집 <<목은시고>>(제35권)에 들어 있다.
<오천(烏川)에게 부치다>라는 제목의 시가 그것이다. 시의 제목에 보이는 “오천(烏川)”은 정몽주를 가리킨다. 정몽주의 본관이 오천(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정몽주는 위기에서 고려왕조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반(反) 이성계파의 최고지도자였다. 정몽주는 인품도 학식도 넉넉한 50대의 실력자로서 구신(舊臣)의 구심점이었다. 그의 정치적 성패가 결국에는 고려의 흥망을 결정지을 것이었다. 이색의 편지는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추석 때는 녹문으로 올라갈까 생각하였지요 擬向中秋上鹿門
하건마는 저는 우리에 갇힌 원숭이 신세가 되었네요 此身還似檻來猿
뉘라서 저를 꺼내 자연으로 돌려보내 줄까요 何人放出林泉去
산북이건 산남이건 마음대로 다니고 싶습니다 山北山南恣意奔
목은이 시어로 사용한 '녹문(鹿門)'은 산 이름이다. 역시 은사의 피신처였다. 중국 후한 말기에 방덕(龐德)이란 선비가 그 산에 숨어 약초를 캐며 살았단다. 이색은 14세기 말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숨고 싶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머나먼 함창에 유배되고 말았으니
자신은 우리에 갇힌 원숭이 신세였다. 이색은 정몽주의 노력에 힘입어 자유를 되찾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다.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터인데 성사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성계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출처: 백승종,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