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조광조의 개혁정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와 그의 시대가 21세기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세 가지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첫째, <<여씨향약>>의 보급이 무척 인상적이다. 형세가 악화되어 조광조가 실각할 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때 수백을 헤아리는 ‘향약인’이 몰려와 개혁파를 두둔하였다.
그들은 형리(刑吏)가 조광조 등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도 대체 이 무명의 선비와 백성들은 왜, 일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광조를 끝까지 지키려하였던 것일까.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이 ‘향약인’에게 새로운 사회질서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바로 참된 지방자치였다. 여론에 따른 직접민주주의였다. 우리는 오늘날 형식적으로만 지방자치제를 시행한다. 현재의 지방자치제는 중앙정부의 권력과 재정적 도움에 기대어 지방지치단체가 기생적으로 연명하는 수준이다.
많은 시민은 지방의회의 독립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조광조의 향약운동은 달랐다. 그것은 성리학적 도덕에 기초하여 향촌사회에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500년 전의 향약운동을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 지식 위주의 과거제도에서 벗어나려고 조광조 등이 혼신의 힘을 쏟은 점도 기억해야 하겠다. 그들이 ‘현량과’라는 새로운 관리 채용 방식을 시험한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그 의미심장한 사실을 반추하는 이는 드문 것 같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폐지된 지 어언 100년도 지났으나,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뀐 것이 거의 없다고 단언해도 좋다. 우리는 아직도 빤한 시험에 의지해서 인재를 뽑는다. 세상사는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복잡다단해졌다. 인재 상에도 큰 변화가 와야 마땅하다.
더 이상 단순한 필기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지 않는 나라가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험 만능론에 붙들려 있다. 대입에서도 본고사를 부활해야한다든가, 예전의 사법고시를 되살리자는 주장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나는 우리가 현량과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재를 기르는 방법이나 선발하는 방법에도 전향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촉구한다.끝으 로, 조광조가 목숨을 걸었던 ‘도덕정치’도 벅찬 감동이었다.그의 도덕 심은 닥쳐오는, 억울한 죽음마저도 피하지 않게 만들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순교자였고, 그래서 길이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5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세상은 그때와 달라서 도덕이란 말만 들어도 돌아서 비웃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도덕이 실종된 정치란 결국 소수 기득권층이모든 것을 독점하는 불의한 세상으로 가기 마련이다.
정치와 도덕은 본령에 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놓쳐서는 곤란할 것이다. 나라의 곳간을 소수의 잘난 사람들이 마음대로 훔쳐가게 놔두면 안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온 세상을 분열시켜도 괜찮다는 미망에 사로잡힌 정치가들이 횡행하는 형국이다.극단적인 편 가 르기가 일상을 지배한다.
원칙을 저버린 사기적인 여론전이 난무한다.이것은 조 광조와 그의 동료들이 추구했던바, 공익을 포기한 결과이다. 파당적 이익 앞에, 그들의 사욕에 정의와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떳떳한 일인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갈파했듯, 현대사회에서조차 학교는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다.
학교에서는 지배집단의 가치와 문화를 일반문화로 과장하며 학생들에게 이를 주입하는 ‘상징적 폭력(symbolic violence)’이 자행되고 있다. ‘문화자본’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도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때가 많다. 교육은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소수 특권층이 대대로 ‘문화자본’을 독점하게 만드는 수단이라고 하겠다.
이야말로 경제적 자본의 상속보다 더 악랄한 상속이다. 지금 이 순간 내 머리에는 역사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조광조는 경연석상에서 경상도 노비 여형의 학문적 성취를 칭찬하며 마치 자기 자신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좋아하였다. 인간의 성취란 세대 간의 세습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결정될 때 비로소 본연의 의미가 있다. 공자의 <<논어>>가 그 첫머리를,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고 수놓은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 점을 우리는 깊이 헤아려보는 것이 좋겠다. 공자가 추구한 교육의 길은, 누구라도 부단한 노력과 성찰을 통해 군자가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부자나 귀족의 아들이 저절로 특권을 세습하는 세상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공자가 바란 적은 없었다. 조광조는 바로 그런 의미로, 경상도의 사내종 여형이 학문에 종사하여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건을 왕에게 보고한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의 교육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조용한 가을 아침, 역사의 희미한 기억을 다시 소환하는 데는 내나름의 간절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