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성의 '이슈 체크'

검찰이 검찰개혁에 의욕을 보인 정치인과 언론인을 잡들이 한 ‘고발 사주’ 만행 의혹이 점차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검찰의 고발 지시를 정당이 충실히 이행한 ‘고발 하청’이거나 ‘청부 고발’, ‘검찰의 연성 쿠데타’ 의혹으로 번져가고 있다.

군주가 통치하던 시대라면 삼족이 형장에서 사라질 일이지만 공화시대 덕에 논란과 공방이 오고갈 뿐이다. 실체는 감찰, 수사, 재판을 거쳐 판명될 일이다. 그러나 내년 3월 대선판도에 따라 ‘공정과 상식’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검찰의 의로운 행동으로 묻힐 수 있다는 얘기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공한 반정과 성공한 쿠데타는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죄를 묻기에는 성공한 자들의 기득권이 너무 견고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국민들이 엄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서인(西人)이 주도한 인조반정, 광해군의 몰락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묘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묘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이어진 왜군의 두 차례 침공은 동북아 정세를 뒤흔들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도요토미 막부가 도쿠가와 이에야쓰 막부로 교체된다. 명나라는 군대 파견 후유증으로 만주의 여진족 세력을 제압하지 못한 채 중원의 패권을 놓고 싸우게 된다. 여진족을 이끈 누루하치는 부족 통합을 이뤄간다. 아들인 홍타이지는 드디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3백년 중원 통치를 이어가게 된다.

왜군의 침공 때 직접 전쟁을 수행한 광해군은 지는 나라와 뜨는 나라가 어느 곳인지 직감하고 실리외교에 나선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빠진 서인들은 광해군 축출에 나선다. 이들은 서인의 임금은 명나라 황제요, 조선의 임금은 명나라 황제의 신하일 뿐이니 서인과 조선의 임금은 같은 신하라고 생각했다.

광해군의 명‧청 등거리 외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광해군은 임금인 명나라 황제를 배신했으니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은 명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의 표시일 뿐이었다. 서인들은 훗날 인조가 될 능양군 이종을 추대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니 이것이 인조반정이다. 그래서 왕위찬탈로 보는 이도 많다.

백성들과 사대부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쿠데타였다. 그러기에 서인들은 정파가 다른 남인을 영의정으로 끌어들여 연정을 꾸리고 민심 달래기에 나선다. 서인의 뿌리 깊은 친명 사대주의는 지는 나라인 명을 추종만하다가 결국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서인들은 명나라가 사라지자 조선이 ‘중화’를 잇는 ‘소중화’의 나라로 자임한다. 

서인들은 먼 훗날 일본이 득세하자 나라를 일본에 바치는데 앞장서고 대일항쟁기(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 서인에 속한 전주 이씨 왕족들 상당수가 나라 넘긴데 힘쓴 공로로 일본 천황으로부터 귀족의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받은 것은 팩트다.

민주정부의 위기, 정치검찰의 반란

현 정부가 검찰개혁을 외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검찰개혁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휘두르고 재판권에도 영향력을 가졌다. 이제 수사, 기소의 분리를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공소 기능만을 갖는 검찰로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이제라도 갖추자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조직은 검찰 독립성을 지켜야한다는 미명아래 검찰개혁에 저항한다. 검찰 수장이 징계사안에 행정소송으로 대통령과 맞서더니 급기야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다.

민주정부를 향해 독재를 운운하며 검찰의 조직적인 반발을 부추기기도 한다. 야권 후보 지지도 1위의 힘도 얻게 됐다. 보수성향의 군중에 공정과 상식을 세뇌시킨 덕이었다. 하지만 정치검찰의 은밀한 행위가 발각됐다. 검찰에서 만들어진 고발장이 정치권의 고발장으로 둔갑돼 검찰이 고발 수사에 나선 것이다.

대상자는 검찰개혁에 의욕적인 정치인과 언론인들이다. 고발 사주와 청부 고발서부터 반란 기도, 검찰 쿠데타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공수처의 즉각적인 압수수색은 이 사안이 얼마나 위중한지 짐작하게 한다.

공익제보자도 엄청난 사안임을 직감하고 소속 정당의 유, 불리를 초월해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다. 더 파헤쳐야할 일이지만 검찰 대수술에 나선 조국 장관과 그 일가, 표창장이라도 엮으려 동원된 사립대 총장의 검찰 연관성까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서인들의 권력욕에서 빚어진 인조반정

광해군을 몰락시킨 서인들은 후환이 두려워 광해군의 목숨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명나라에 광해군의 목을 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자는 고집도 부린다. 그러나 어쩌다 왕위에 오른 왕족 능양군(인조)은 폐위된 임금을 죽일 수는 없다며 요구를 뿌리쳤다. 광해군이 죽지 않고 19년간 모진 목숨을 이어간 것도 명분이 약한 반정이었던 이유도 한몫 했다.

서인세력이 천여 명의 군사로 왕권을 갈아치운 것은 명나라를 섬기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결국은 집권을 위해서였다. 권력을 잡지 않으면 벼슬 없이 살아갈 자신들의 한심한 삶 때문이었다. 실제로 반정의 핵심인물은 몇몇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광해군이 왕위에 있다면 입신할 가능성이 없는 주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반정군의 대장으로 추대된 김류, 반정군을 지휘한 이서도 탄핵을 받아 지방 수령직을 전전하던 처지였다. 반정군의 스승격인 김장생은 동생이 옥사에 연루돼 겨우 혐의를 벗었지만 관직은 엄두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들은 반정에 성공하고도 능양군의 왕위를 승인해달라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만 반정의 실세들은 모두 사절단에서 빠진다.

반정공신들의 패륜적인 행위에 대해 명이 질책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명의 조정 분위기는 험악했다. 명 조정에 올라온 명나라 신하가 기록한 보고서에는 ‘조카가 숙부를 폐위한 것은 명백한 찬탈입니다....찬탈한 역적들을 토벌케 하고 쫓겨난 광해군을 복위시켜야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반정세력은 경악했다.

검찰 수사 기소권은 막대한 권력이자 돈

공수처(자료사진)
공수처(자료사진)

해방 후 우리나라 검찰은 저절로 굴러 들어온 별을 잡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법률가 공급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대일항쟁기(일제 강점기) 법원에서 일하던 서기들이 대거 임용됐다. 조서 작성 실무가 밝아 현장에 투입해 써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인 검사가 조선인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통역까지 담당했다. ‘서기 겸 통역생’으로 막강한 권한까지 행사한 것이다.

이들은 조선시대로 치면 중인 신분이던 법률 전문직이 법복 귀족으로 전환된 행운을 안았다('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김두식). 법조계의 고문과 조작, 과장 그리고 각종 뒷거래가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브로커 짓은 일제로부터 고스란히 이어받은 유습이다.

정윤회 사건의 진실을 외면한 검찰, 억대의 수임료 수십억의 수임료 수입을 누락한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 비리, 무상으로 주식을 받아 거액을 챙긴 현직 검사장 진경준 비리,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권력의 시녀 정치검찰, 위법한 수사로 상대정당 정치인의 정치 생명을 끊은 한명숙 총리사건, 멀쩡한 공영방송 사장을 배임으로 엮어 쫓아낸 정영주 KBS사장 사건, 언론의 재갈을 물린 PD수첩 기소, 인터넷 표현의 자유를 봉쇄한 미네르바 사건 등은 정치검찰의 현주소이자 검찰이 적폐 1호임을 방증한다.

검찰의 수사, 기소권은 권력인 동시에 돈이다. 그들에게 검찰개혁은 지금껏 누려온 권력과 돈을 뺏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영민한 그들은 검찰개혁에 적극적인 장관과 정치인, 언론인을 선별해 수사와 기소로 목을 노렸다. 그런 죄악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여 명의 반정군이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차지했다. 지금은 2천 명 조금 넘는 검찰조직이 민주주의를 압살하려한다. 인조반정 당시 왕권 수호자는 광해군 한 명에 불과했지만 지금 이 땅의 민주주의 수호자는 5천만 명이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검찰의 반란기도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지만 검찰조직 내부에서 반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보다 철저한 검찰개혁만이 민주주의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우리의 의무다. 

/김명성 논설위원(전 KBS전주총국 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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