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아이고야! 이대로 그만둬야 하나? 이것 참!”

며칠 전이다. 어느 지인의 푸념 아닌 넋두리였다. 그가 이처럼 탄식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마라톤 마니아다. 풀코스 마라톤을 100회 이상 완주했다. 공식 대회 출전이 그러하니 연습주(走)까지 셈하면 어림잡아 4만6,400㎞를 달렸다(42km×1100회, 페르미 추정법에 근거, 셈했다).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다(지구의 둘레는 약 4만192km). 그것도 걸어서가 아니라 뛰어서다. 마흔여섯에 늦깎이로 마라톤에 입문해서 쉰여섯까지의 십년 남짓한 기록이다.

최고 기록은 동아마라톤에서 얻은 3시간 8분대였다. 서브 쓰리(3시간 이내 주파)를 이루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그 목표를 이루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가. 하루 5시간 연습을 2년 가까이 했으니 전문 선수 아닌 아마추어 처지에서 본다면 불퇴전의 각오 아니었나. 그것도 직장 일 마치고 했으니 거의 미치다시피 했던 집념이었다.

그는 산악마라톤에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마라토너들의 꿈의 무대인 불·수·사·도·북(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5산 종주 산악 마라톤)도 여러 번 했다. 모악산은 늘 뛰어서 오르내렸다.

그는 ‘철인(아이언 맨)’이기도 하다. 트라이애슬론(triathlon)도 한번 했기 때문이다 (풀코스 완주자는 철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철인3종의 창안자 존 콜린스의 선언에 따라서다). 수영, 사이클, 마라톤의 세 가지 종목을 해야하는 게 철인3종 경기다. 그야말로 극한의 인내심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다. 철인이므로.

지구 한바퀴를 뛰었다-마라톤 마니아 임용진

임용진 씨(전 언론인)
임용진 씨(전 언론인)

3백 미터 거리만 돼도 택시를 타던 그였다. 그런 그가 직장 동료의 선물, 마라톤 운동화 한 켤레로 마니아가 됐다. 담배를 끊으려고 결심해서 체중이 7~8㎏ 불자 동료가 사준 게 마라톤화였다.

그는 울트라를 한 번만 더 하고 마라톤을 매듭지으려 마음먹고 있다. 그러나 그 마무리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 준비과정에서 그만 아킬레스건(腱)에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노고단, 화개재 등 지리산을 여러 차례 다니며 울트라 준비에 욕심을 부렸다. 무리했다. 그것도 다 ‘이 정도 쯤이야’하는 마음 탓이었다. 그래서 이젠 ‘아! 내 몸도 이제 쇠잔해졌나’하는 의아심이 생겼다. 나이 탓일까? 하기야 예순여섯이면 몸 굴리기에 적은 나이는 아니다.

인생의 큰 기쁨이자 활력소였던 마라톤! 이대로 그만둬야 하나. 미련이 많이 남는다. 참 아쉽다. 그는 수십개 완주 메달을 들어보이며 쓸쓸해 했다.

때로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오래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황홀한 느낌)도 러너들을 유혹한다. 어서 달리라고. 달리지 않고 뭐하고 있느냐고 채근한다. 하지만 그런 건 이미 졸업한 지 오래다. 초급자들이나 현혹되는 유혹에 그는 이제 넘어가지 않는다. 그저 달리면서 맛보는 하나의 과정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다만 달리기를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는 싶은데. 몸이 빨리 회복돼야 할텐데.

실제로 러너스 하이 때문에 달리기에 중독되는 러너들이 많다. 이때의 의식 상태는 헤로인이나 모르핀 혹은 마리화나를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때로 오르가즘에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니 달리기는 중독이다.

안 달려본 사람들은 달리는 사람의 쾌감을 모른다. 담배도, 술도, 마약도 아닌데 ‘지루하기만 한’ 달리기에 중독이라니? 아니다. 모르는 소리다. 달리기가 바로 마약이다. 좀 달려봤다는 사람들은 안다. 그 짜릿한 희열을. 그리고 달리기에 왜 중독되는지를. 어쨌거나 러너스 하이는 여유 있는 마음으로 달리기에 몸을 맡길 때 찾아온다. 짜릿하고 황홀하다. 매혹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러너스 하이는 왜 오는 걸까? 과학자들이 러너스 하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캘리포니아대 심리학자인 아놀드 J 맨델이 1979년 정신과학 논문 ‘세컨드 윈드(Second Wind)’를 발표하면서부터다. 그 뒤 러너스 하이를 경험할 수 있는 운동 시간과 강도, 방법 등에 대한 연구와 행복감의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일부 학자는 운동시에 증가하는 베타 엔돌핀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베타 엔돌핀은 우리 몸에서 생성되는 신경물질로 구조와 기능이 마약과 유사하다. 베타 엔돌핀은 운동시에 5배 이상 증가하는데, 그 효과는 일반 진통제의 수십 배에 달한다.

그래서인가. 러너들은 달린다. 어제도 달리고 오늘도 달린다. 내일도 달리겠지. 2만~3만 명이 뛰는 마라톤 대회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다. 그 속에 들뜬 기분으로 달리려 했다가는 자기 페이스를 무너뜨린다. 이른바 오버페이스다.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기는 ‘엉덩이 페메’ 따르다가 오버페이스하는 때도 있기는 하지만. 마라톤은 뭐니뭐니 해도 내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울트라 마라톤이 풀코스보다 오히려 쉽다고 한다. 울트라는 재미를 느끼며 달린다고 말한다. 그게 말이 되는가. 아마도 육체적으로는 힘들어도 정신적으로 즐기면서 달린다 그 뜻이겠지.

마라톤에서 교훈 얻어 요령·잔재주 멀리 하게 돼

인간은 상당 부분 본능에 따르며 살아간다. 그는 달리는 게 본능처럼 몸에 익었다. 그렇게 달리기와 하나가 돼서 살아왔다. 마라톤을 통해 그는 여러 가지를 배웠다. 먼저 요령 피우는 것을 싫어하게 됐다. 한발 한발 떼어놓는 대로 몸이 나아간다. 그러니 임기응변이라는 미명 하에 잔재주 피우는 것을 꺼리게 됐다. 정도와 정공법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마라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준비하고 연습한 만큼 몸이 따라온다. 딱 그만큼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그는 누구인가? 바로 임용진씨다. 40년 가까이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딜레탕트이자 스포츠 전문가이다. 기자에게 러너스 하이를 맛보게 해준 마라톤 스승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이런 책을 봤다. 스티브 도나휴가 쓴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책이다. 그 책 첫 페이지에는 생텍쥐페리의 책에서 인용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는 지도를 보면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손에 지도를 들고 있었지만, 사막에서는 그 지도가 소용이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는 사하라 사막을 종단했다. 그리고는 인생이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기보다는 사막을 건너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산을 탈 때나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는 얼마나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 계획은 잘 세웠는지, 그리고 경험이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사막은 다르다는 얘기다. 사막은 GPS 안내 시스템이 소용이 없게 될 때도 있고, 계획과 경험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만큼 예측이 불가능하고 불확실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뜻이다.

때에 따라서는 끝은 보이질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쫓기도 한다. 목표를 볼 수가 없고,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여부도 알 길이 없다. 인생이 불확실해 보이고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계획과 경험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바로 사막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이러한 성취나 성공, 또는 목표가 전부는 아니다. 인생이란 종종 길을 잃고, 스스로를 발견해 나가며, 때로는 사면초가에 처하기도 하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고, 신기루를 좇기도 한다.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도 없고 쉴만한 그늘도 없는 모래 사막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무대이다.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여운 사람 길동무 삼자

낙타에게 꿈이나 바람이 있을까? 동물에게 그런 의지적인 면이야 있겠는가만 낙타도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은 있다. 사람들이 이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우선 빨리 달릴 수 있으나 가급적 달리지 않는다. 긴 여행 끝에 평평한 등을 남기는 낙타처럼 모두 소모하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한 시인이 말곁하며 우리를 위무한다. 그러니 우리네 인생 신경림 시인의 「낙타」를 나지막이 읊조리며 걸어가자, 사막보다 더한 지금, 여기의 나날을 지나가자.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 별과 달과 해와 /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 손 저어 대답하면서, /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 별과 달과 해와 / 모래만 보고 살다가, /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 길동무가 되어서.

낙타는 평생 등에 짐을 싣고 살아가는 짐승이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광야를 건넌다. 누구에게나 무거운 인생의 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낙타는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았다. 우리의 삶이 광야를 건너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 광야를 건너는 낙타이다. 우리 인생도 거개가 이같은 낙타의 처지와 매우 흡사하지 않을까 싶다

낙타는 자기 짐을 지지 않는다. 주인이 실어 주는 짐을 진다. 낙타는 아침이 되면 주인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 그러면 주인이 낙타에게 짐을 실어준다. 이 때 주인은 적당한 짐을 실어줘야 한다. 만약 욕심을 부려 너무 많은 짐을 실어주면 얼마 가지 않아서 낙타가 쓰러져 죽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욕심 때문 아닌가. 욕심을 줄이면 짐이 훨씬 줄어들 텐데, 욕심을 채우려고 끙끙거리면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

너무 욕심 부려서 많은 짐을 지려고 하지 말라. 너무 욕심을 부려서 더 멀리 가려고 하지 말라. 질 수 있는 만큼만 지고,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라. 남보다 많이 지고 남보다 빨리 가려니까 짐이 무거워지고, 결국 감당하지 못해서 쓰러진다. 인생의 짐을 줄여야 한다. 걱정, 근심, 염려의 짐을 내려놓으라. 그러면 인생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낙타는 조급해 하지 않는다. 항상 느긋하다. 먼 곳을 바라보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 사실 낙타는 뛰기로 마음먹으면 무척 잘 달린다. 사람을 태우고도 시속 20km로 달린다고 한다. 그러나 짐을 싣고 갈 때는 절대로 뛰지 않는다. 잘 뛴다고 과시하려다가 금방 지쳐 쓰러져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사람들은 말을 타지 않고 낙타를 탄다. 왜 그런가? 말은 빨리 달리기는 하지만 오래 달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낙타는 빨리 달리지는 않지만 오랫 동안 걸을 수 있어서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서둘러서는 안 된다. 사막에서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에너지를 보충해둬야 한다. 필요 없는 일에 힘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낙타는 달릴 수는 있지만 달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헐떡이고 살아간다. 낙타는 헐떡이지 않는다. 헐떡이면 수분이 증발되면서 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코 숨이 찰 정도로 달리지 않는다. 그저 천천히 간다. 이것이 사막에서의 생존 전략이다.

우리의 인생은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광야를 지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속도를 줄여야 하며 너무 많이 가려고 욕심 내지 말아야 한다. 짐도 너무 많이 지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조급해서, 서두르기 때문에, 욕심이 지나쳐서 쓰러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은행잎이 떨어진다...가을이 깊어간다 

그리고 사막은 함께 건너야 한다. 혼자서는 건널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듯이 건넌다면 지쳐서 쓰러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을 라이벌이 아니라, 동행자로 여겨야 한다. 사자가 사막을 건너는 것이 아니다. 느리지만 묵묵히 걷는 낙타가 사막을 건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낙타는 사막을 지나다 모래 폭풍이 불어오면 그 자리에서 멈춘다. 무릎을 꿇고 그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폭풍이 다 지나면 다시 일어나서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인생의 폭풍이 불어오면 뚫고 나가려고만 하지 말고, 잠시 멈춰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인생의 폭풍이라도 다 지나가게 돼 있다. 참고 인내하면, 인생의 모래 폭풍도 잦아들지 않겠는가.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나무가 시들어서 잎이 다 떨어졌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樹凋葉落時如何)라고 물었다. 운문선사가 말하기를 “가을바람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앙상한 나무 몸체가 그대로 드러나겠지”(體露金風) 했다. (「벽암록」 27칙)

표현이 퍽 문학적이지만 뜻은 심오하다. ‘체로’는 전체로현(全體露現)을 줄인 말로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말하고, ‘금풍’은 가을 바람을 말한다. 가을은 오행 중에서 금(金)에 해당하지 않든가.

늦가을 찬 바람에 나뭇잎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나무는 앙상한 몸체를 드러내고 서있는 모습도 스산하다. 한 해 동안 나무를 키워줬던 잎들 아닌가. 그 잎들을 떨궈내는 나무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한 몸이었던 나무와 잎이 서로 작별하고 갈 길을 달리 한다. 나무와 낙엽처럼 감정과 관념의 진액이 모두 빠져나간 무심도인의 경지를 문답으로 담론하는 27칙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본디 뜻은 ‘낡은 것은 모두 제거해 없어지고 오직 진실한 법만 남아 있다.’ 이런 가르침이겠지만 세상 자연의 변화와도 흡사하다. 하여 때가 되면 헤어지고 나뉘는 것이 마땅한 자연칙이 된다.

사람의 삶과도 닿아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는 곧 사람의 일생으로 치면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빗댈 수 있다. 때문에 가을날 은행잎 떨어지는 풍경에서 삶과 자연의 철리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눈 밝은 현인(賢人)이나 달사(達士)가 된다.

어디 안동답답이나 판무지렁이처럼 세상의 흐름에 뒤져서야 될 일인가. 봄·여름에 나무를 키워냈던 나뭇잎이 가을이 되어 진액이 빠져나간다. 마침내 낙엽이 되어 그것마저 떨어내고 늦가을 나무는 홀로 남는다. 그러고는 찬란하게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기꺼이 외로움과 추위를 감내한다.

가을바람(金風) 하면 단풍보다는 먼저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가을날 낙엽을 밟을 때면 운문선사의 ‘체로금풍’ 화두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런 저런 슬픔일랑 떨어내자. 저 앙상한 나무처럼, 저 낙엽처럼 비우고 떠나자.

그렇듯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내년 봄에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다. 지금은 비우고 또 비울 때다. 명심할 일이다. 새로운 채움을 기약하며 비움을 서운해 하지 않겠다고. 할(喝 깨우쳐라)!

/이강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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