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여름이 물러갔다. 여름의 흔적들 위로 조용히 가을비가 내린다. 무성해진 나뭇잎들, 우거진 풀들이 비에 젖는다. 낮인데도 하늘에 낮은 구름이 드리워져 사위가 어두컴컴하다. 다시 비가 한차례 뿌릴 기세다.
밤나무 숲에서 까치들이 깍깍거린다. 어느새 노을이 진다. 하지만 노을이라 해서 다 똑같지는 않다. 아침 노을과 저녁 노을은 다르다. 실학자 이덕무는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이렇게 견주었다.
‘아침노을은 진사(辰砂)처럼 붉고, 저녁노을은 석류꽃처럼 붉다.(朝霞辰砂紅 夕霞榴花紅)’
오묘하고 황홀한 그 붉은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뭐라 설명하겠는가. 이처럼 빗대서 말할 수밖에… 그 야릇한 차이를 가릴 줄 아는 눈이 ‘보는 눈’이다. 그런 눈 덕에 이덕무는 그림도 잘 그렸다. 보는 눈은 그렇듯 중요하다. 사람의 눈 속에 들어앉은 부처를 본 일이 있는가. 글쎄! 본 사람도, 못 본 사람도 있겠지만 설명을 들으면 ‘그건 물론 보았지’ 할 것이다.
눈 속의 부처는 바로 ‘눈부처(瞳人)’다. 눈부처는 눈동자에 비친 사람의 모습을 가리킨다. 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또 한 사람의 모습을 ‘눈 속에 앉아있는 부처’라고 표현한 말이다. 곧 상대방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보이는 것을 이른다.
따라서 상대와 마주하거나 대화할 때 그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봐야만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상대의 눈을 쳐다보게 되면 그 눈동자에 내가 그려질 것 아닌가. 그래서 상대 눈동자에 맺혀있는 내 눈부처를 보게 된다.
눈부처는 내 외형상 모습을 상대방 눈동자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내 모습 속에 숨어 있는 부처, 곧 타자와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로 비추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눈부처는 내 모습이니 나이기도 하고, 상대방의 눈동자에 맺혀진 상이니 너이기도 하다.
이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눈부처는 상호존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서로의 진정한 실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서로의 눈부처를 본다는 것이 예사로운 사이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므로. 만일 거짓이나 숨겨둔 다른 마음이 있다면 상대방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을 것 아닌가.
내 눈의 부처, 네 눈의 부처는 서로 존중
정호승 시인은 ‘눈부처’라는 시에서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라고 노래했다.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정 시인은 자기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 곧 자기 눈부처를 보고는 놀랍고 행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을 꼭 글로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씌어진 것이 ‘눈부처’이다. 정찬주의 어른을 위한 동화에 ‘눈부처’라는 작품이 있다. 전체 줄거리는 이렇다.
부처가 되고 싶어하는 어린 동자승이 있었다. 노승은 그 동자승에게 부처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부처는 바로 ‘네 안에 있다’고 가르쳐줬다. 아이는 부처를 찾아 사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이는 어디서도 부처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동자승은 노승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노승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아이는 비로소 부처를 찾은 것이다. 스토리를 보자.
아이는 노스님 눈에 비친 것은 무엇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노스님의 그윽한 눈은 깊은 우물이었다. 노스님의 눈 우물에 들어가면 알록제비꽃이나 서산의 붉은 놀이나 법당의 미소짓는 부처님이나 처마 밑에서 뎅그렁거리는 풍경이나 모두가 신비하게 바뀌었다. 노스님의 눈에서는 무엇이나 더 맑고 작게 빛났다. 아이가 노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해탈꽃이 스님 눈에도 피었어요. 콩알만하게 피었어요.”
해탈꽃이란 하얗고 비녀처럼 생긴 옥잠화를 가리킨다. 스님들이 여름 공부(하안거)를 마칠 무렵에 꽃이 핀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
“이 녀석아, 지금 네가 해탈을 보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스님 눈은 마술사예요, 세상의 모든 것을 콩알만하게 만들거든요. 너무너무 작아서 거기에는 먼지도 묻을 수 없어요.”
정찬주의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
노스님은 아이의 눈망울이야말로 꽃을 밴 꽃망울이라고 여겼다. 아이가 보는 것마다 아이 눈에서는 꽃이 되고 있었다. 노스님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게 보면 다 눈에 꽃이 되고, 나쁘게 보면 다 눈에 가시가 되는 법이지.”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아이는 노스님의 입 모양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금세 알았다. 혼잣말 중에 ‘관세음보살’ 이란 말을 가장 많이 외고, 방금 한 말은 그 다음으로 자주
했다.
노스님은 세상이 향기로운 꽃으로 보이기도 하고, 아픔을 주는 가시로 보이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인데, 노스님이 암자에서 오래전에 깨달은 경지였다.
아이는 노스님의 눈에서 법당의 부처님만 빼고 모든 것을 다 보았다고 생각했다. 법당이 너무 비좁기에 노스님 앞으로 나아가 법당의 부처님만은 노스님 눈에서 볼 수 없었다. 노스님은 하루에 한 번씩 향을 태우고 부처님께 따뜻한 밥을 올리지만 아이는 노스님 눈에서 부처님을 보지 못했다.
소나기가 갠 후였다. 목욕한 산이 옷을 갈아입었다. 미처 몸을 덜 씻은 것은 옥잠화뿐이었다. 잎에 흙탕물이 튀어 얼룩이 져 있었다. 노스님이 부엌에서 그릇 씻는 행주를 가지고 나와 옥잠화 잎을 닦았다. 아이는 하고 싶은 얘기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숨긴 일이 없었다.
“스님, 스님 눈에 비친 부처님을 보고 싶어요. 머루 알처럼 작아진 부처님을 보고 싶어요.”
“어디에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을 꽃으로 보는 사람 눈에는 비치는 것마다 다 부처다.”
아이는 이해를 못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정말 꽃으로 보여요?”
“빈 마음으로 보면 다 아름다운 거다. 빈 마음이란 너니 나니 분별이 없어진 자리다.”
“그럼, 스님 눈에 비친 것들은 다 부처님이네요.”
“어허, 누가 나더러 깨쳤다고 하더냐?”
스님은 오히려 아이 눈에 비친 것들이 부처라고 믿었다. 스님과 아이는 통나무 의자에 앉았다. 지빠귀가 날아와 종종거리고 다람쥐도 끼어 달라고 기웃거렸다. 스님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 지금부터 눈에 비친 ‘눈부처’ 를 볼까?”
아이는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자꾸 두리번거렸다. 무엇에나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노스님은 아이의 꽃망울 같은 눈에 비치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산과, 소나기를 실컷 먹은 뒤 졸고 있는 파초와, 암자 가까이 이사온 뻐꾸기와, 여름이 되어 튼튼해진 새끼 억새 옆에서 시드는 엄마 억새까지.
노스님은 눈길을 한 곳에 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이만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이는 노스님의 눈 우물에 비친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노스님 눈에는 머루알만큼 작아진 자신의 모습만 보였다.
노스님은 아이를 오래도록 눈에 넣었다. 아이야말로 천진한 부처였다. 통나무에 앉은 두 사람이 지빠귀와 다람쥐 눈에 비쳤다. 지나가던 흰 구름이 암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부처를 보거나 되는 일은 시(詩)나 불가(佛家)의 가르침 속에만 가능하지는 않을 터이다.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신뢰하는 사이라면 눈부처가 항상 서로의 눈 속에 자연스럽게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부처를 가진 사람은 마땅히 상대방을 아낄 것이 분명하다.
눈부처를 통해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가진 사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혹여 못 가진 이들은 지금부터라도 눈부처를 모셔볼 일이다. 내가 눈부처가 될 수도 있고 내게 눈부처를 모셔올 수도 있다.
지금 여기서 내 눈부처를 보리라. 그대에게 다가서서 그대의 눈부처를 보여주리라. 얼마든지 이렇게 꿈꿀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소망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내가 보는 내 눈부처도, 내 눈동자에 아로새겨진 네 눈부처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꼭 부부나 연인이 아니더라도 부자간, 모녀간, 사제간, 친구간, 형제자매간도 가능할 터이니…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