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김정한의 <<비혁명의 시대 - 1991년 5월 이후 사회운동과 정치철학>>(빨간소금, 2020. 07)

저자 김정한은 1991년 5월 이후 한국의 사회운동과 정치철학을 정산하는 작업을 벌인다. 그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가늠하려는 뜻에서 이 책을 쓴 것이다.

책에서 저자가 내린 결론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애도”의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즉, 지난 역사의 상실의 슬픔을 극복함으로써 그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저자는 ‘멜랑콜리’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사회의 집단적 낙심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비난하고 스스로를 응징하려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애심(自愛心)”을 상실했다는 것인데, 장차 사회적 애도를 실천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전환하여 새로운 연대를 형성하기를, 저자는 간절히 바라는 듯하다. 그의 육성을 들어본다.

“애도의 정치는 죽은 자에 대한 사회적 애도와 더불어 타자와 마주하고 관계하는 양식을 전환시키는 일이다. 이를 ‘애도 간의 대화’에 기반한 새로운 연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338쪽)

이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는 ‘사회운동의 풍경’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저자 김정한이 정치 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회를 관찰하고 분석한 내용이다. 그가 가장 주목한 것은 ‘1991년 5월 투쟁’과 그 이후 일어난 급격한 사회적 변화이다.

그해 5월부터 약 두 달 사이에 학생, 노동자, 빈민 11명이 분신하였다. 거리 시위도 폭발적인 수준이었다. 세상은 이를 ‘분신 정국’이라 불렀는데, 사태가 종결된 직후 세상은 갑자기 싸늘해졌다. 국면의 대전환이 일어났다고 할까. 왜 그랬던 것일까. 김정한의 진단은 이러하다. 

“1991년 5월 투쟁이 갑자기 소멸한 이유는 ...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 했던 것은 서럽고 처절한 투쟁이 그만 종결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얄궂게도 1991년 5월 투쟁은 1980년대 민중운동이 상상했던 총체적 전민항쟁으로는 더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6쪽)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투쟁이 종결되기를 원했다는 것, 이로써 민중 혁명은 조용히 막을 내린 셈이었다. 1991년 5월의 투쟁은 결국 민중운동 세력이 지배 권력에 지고 말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내외의 복잡한 사정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때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조리 붕괴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후 민중이란 용어를 우리 사회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신세대가 나타났고, 각종 포스트 담론이 현란하게 빛을 뿜었다. 1980년대에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는 폐기되었고 많은 사람의 전향 선언이 줄을 이었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는 1980년대에 가졌던 자신들의 꿈을 ‘미망(迷妄)’이라 고백하며, 자신들의 지난 날을 스스로 부정했다. 이후 그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종하며 세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몰아갔다.(이 역시 실패한 운동이었다.) 민중운동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운동세력은 사물의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을 간과하고 모든 문제를 도덕의 잣대로만 따졌다.

그리하여 틀려먹은 적과 정당한 우리로, 세상을 양분화하는 데 익숙했다. 1990년대의 한국사회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겠노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고질적인 자본과 노동의 문제는 여전했고, 여성 차별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생태 위기가 가중되는 데도 해결책은 전혀 없었다. 우리의 새로운 정치 사회적 현실은, ‘시민사회’에 큰 기대를 거는 듯하였으나 그 때 시민사회의 기능은 매우 취약했다. 이것이 1990년대 한국현대사회의 현주소였다.

책의 제2부에서 저자는 지식층에게 익숙했던 ‘정치철학의 풍경’을 그린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라클라우와 무페, 지젝, 라캉 등이 등장하여, 저마다 자신의 사상적 특징을 설파한다. 물론 저자의 중계를 통해서이다.

저자 김정한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1990년대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인 것 같다. 폭넓은 사상적 점검을 거친 끝에 저자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상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에게는 ‘헤게모니 투쟁’(라클라우), ‘계급투쟁’(지젝), 그리고 ‘대중운동’(알튀세르)이라는 세 개의 카드가 쥐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이라면 어디에 내기를 걸겠는가?”(224쪽)

이 책을 읽을 때 가슴에 와닿은 대목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두어 가지만 간단히 적어본다. 우선 정치를 섣불리 도덕화하면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평소 나의 주장과 일치하기 때문에 많은 공감을 느꼈다.

“(민중주의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를 도덕적인 잣대로 접근해서 ‘우리’와 ‘적’을 구별하고, 대중들의 도덕적 분노를 동원하는 방식(인데 그것)은 오히려 그에 대한 적합한 인식과 해법의 창출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노무현 정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이, 정당성의 위기에 처한 지배 세력이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하는 정치 갈등을 호도하기 위해 (역으로) 민중주의를 활용하여 임의의 ‘적’을 상정하고 도덕 담론으로 ‘말들의 전쟁’을 전개할 때 대중들의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냉소와 환멸은 더욱 확대될 수 있다.”(79쪽) 

정치의 지나친 도덕화를 저자는 경계한다. 2022년 대선을 앞둔 한국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지금도 단순한 도덕 논쟁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걱정을 놓지 못하겠다. (정책은 실종되고 도덕으로 채색된 흑색 선전만 난무한다!) 또, 하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방향에 관한 것이다. 김정한은 이렇게 썼다.

“새로운 정당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힘으로 구성될 수 있으며, 새로운 사회운동은 제도정치를 무시하고 기각할 것이 아니라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해야 한다. 현대의 군주가 정당이고 현대의 호민관이 사회운동이라면, 현 정세에서 우리에게는 군주와 호민관이 모두 필요하다.”(132쪽)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실천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과제임일 것이다. 재벌의 지배를 받는 정당제도 아래서 과연 개혁 세력이 설 땅은 어디에 있을까,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끝으로, 역시 난제 중의 난제일 터인데 훗날을 위해 적어본다. 사회 운동의 헤게모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대 사회에는 자본주의적 모순과 적대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적대들이 있으며, 이 다원주의적 조건에서는 어떤 하나의 사회운동이 선험적으로 중심적인 지위나 지도적인 역할을 담지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운동들은 등가 관계에서 헤게모니적 실천을 전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심화시켜야 한다.”(180-181쪽) (이것은 너무 이론에 치우친 주장이 아닌가 싶으나, 민주주의란 인간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본래 허망한 것이다!) 

저자 김정한에 관해 간단히 적어본다. 그는 현재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로 일한다. 그의 연구는 ‘사회운동과 정치철학’의 만남을 모색하는 데 중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5·18’에 관하여 다각적인 연구를 해왔는데,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치 사회적 현상과 그 저변을 흐르는 사상의 미묘한 함수관계를 명쾌하게 구명하는데 애써 주기를 기대한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