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수의 '세평'

8월 29일 오늘은 111년전인 1910년 8월 22일에 이웃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강제 합병이 강제로 조인되어 8월 29일 공표한 국치일(國恥日)이다. 나라의 주권을 강탈당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날이다. 이 국치일을 기억해야 한다. 왜 당시 조선(한국)은 20세기 초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전락당했는지 냉철하게 자기를 직시하고 점검해야 하는 의미로 그렇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 조선국 조정(朝廷) 대신들은 왕과 백성을 배반했다. 그러자 전국의 농민 백성들과 유생들이 일어났다. 1894년 동학 농민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조정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을 끌어들여 대대적인 학살로 백성들을 탄압했다.

2019년 10월 일본의 사학자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 1945- ) 홋카이도 대학교 명예교수는 127년 전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에 대한 논문을 일본과 한국에 발표한다.

“동학농민혁명 투쟁 중반 무렵인 1895년 1월 5일, 동학농민군 토벌대대인 일본군 후비독립보병 제19대대가 나주성에 입성했다”며 “잔혹한 토벌전의 역사, 그리고 그것을 발굴할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깊이 사과를 드린다”고 밝혔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 사과문을 친필 한국어와 일본어로 작성해 2년 전에 발표했다.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의 기록이 발견됐음을 논문에서 말했다.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가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1894년 12월2일자 편지를 처음 공개했다.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가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1894년 12월 2일 자 보고서 기록.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가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1894년 12월 2일 자 보고서 기록.

양심적인 일본의 사학자 이노우에 교수는 “일본군 토벌대대는 전라남도 일대인 나주 능주 영암 보성 강진 장흥 진도 등지에 전개하여 마지막까지 항전하는 동학농민군을 잔혹하기 짝이 없는 작전으로 토벌했다”며 “마을로 들어가서 농민군에 참가한 농민을 색출하고 체포해 총살하고, 고문한 후에 총살하고 불태워 죽이고 줄 서게 해서 총칼로 일제히 찔러 죽이기 까지 했다”고 당시 잔혹함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일본과 조선은 교전했던 것이 아니었다. 조선 농민은 조선의 사법권 속에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대학살이 국제법에 위반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인간의 당연한 ‘인도(人道ㆍ인간적 도리)’에도 완전히 위배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군 현지사령관이 지시한 잔혹한 살육은 당시 일본군 지도부에서 명령한 작전이었다고 한 것은 귀중한 증언”이라며 “동학농민군 지도부의 문서는 일본에 의해 철저히 빼앗겼는데 이 같은 역사를 밝힐 책임도 일본에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동학농민혁명(자료 사진)
동학농민혁명(자료 사진)

이노우에 교수는 "(일본은) 왜, 어떻게 처참한 토벌 작전이 전개됐는지 해명할 필요가 있다"며 "1세기 이상 어둠 속에 묻혀버린 역사적 사실의 전모를 밝혀내고 발굴하는 일부터 시작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동아시아는 지금도 대립과 분단이 가로막고 있다”며 “민족, 국가를 넘어서 함께 역사적 진실을 해명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했다.

이노우에 가쓰오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는 일본군 하급 장교의 기록은 작성자의 고향인 시코쿠 도쿠시마현에서 입수한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 기록 일부를 그대로 옮겨온다.

1895년 1월2일 옥과에서 농민군 5명을 고문한 뒤 총살하고 시신은 불태웠다. 4일엔 능주에서 농민군 70~80명을 체포, 고문하고 20명 정도를 총살했다. 5일, 능주에서 또 농민군 수백명을 체포해 수십명을 총살했다. 7일엔 장흥에 들어가 40~50호의 농가를 불태우고 농민군 10명을 죽였다. 8일에도 장흥에서 착검 돌진(돌살)과 일제사격, 방화를 자행한 뒤 “대일본 만세!”를 삼창했다. 9일 역시 장흥에서 8명의 농민을 생포해 3명을 타살(때려죽임)했고, 이어서 도망치던 농민을 추격해서 48명을 타살하고 다친 사람 10명을 생포해 고문한 다음 소살했다."

"1월11일 장흥 일대 통행자를 모조리 붙잡아 고문했고, 저항자는 옷에 불을 붙여 달아나면 총을 쏘아 죽였다. “그 광경을 보고 모두 웃었다.” 죽청동 인근에선 12살 아이를 꾀어 동학군을 지목하게 한 다음 16명을 고문하고 8명을 총살해 시신은 불태웠다. 죽천 장터에서도 18명을 죽였다. 대흥면 쪽으로 가다 11명의 농민을 붙잡아 죽였고, 3명은 옷에 불을 붙여 바다 쪽에 빠져죽게 만들었다. 13일 대흥면 산에서 농민군 수십명을 잡아 죽였다. 길옆과 도랑에 버린 시신이 수십명이었다.

전봉준 장군
전봉준 장군

“순창읍의 한 주막에서 동학당 대괴수 전봉준을 포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4일 장흥에서 농민군 17명을 체포해 죽였다. 그날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최동이라는 17살 동학 지휘관을 체포했다. 1월 이래 죽인 농민들이 300명에 달했다. 22일 해남에서 붙잡혀 온 농민군 16명을 총살했다. 31일엔 “동학농민군 7명을 밭 가운데 일렬로 세워놓고 총에 착검을 하고 돌격하여 찔러 죽였다. 

127년이 지난 21세기 2021년 오늘, 한국인들 중에서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 역사 사실들을 도외시 하고 도리어 일본의 침략 사실을 “근대화”라는 허울로 미화하는 자들의 책동이 계속되고 있다.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배은망덕과 파렴치한 자들이 대통령까지 하겠다면서 민주주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행태가 공공연한 현실이다. 민주주의 시민들의 현실 직시가 절실한 때이다.  

/김상수(작가·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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