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저조하니 일은 안 되고, 허둥지둥하다가 하루가 간다. 그나마 책이 읽히니 시간을 영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노라 핑계로 삼는다. 스포티파이로 70년대 소울과 컨추리 음악의 역사를 훑고 있는데 길잡이로 삼을 만한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서라벌 사람들(심윤경 지음)
놀라운 소설이다. 삼국유사를 판본으로 삼았으되, 고대에 존재했던 신라를 신국(神國)이라는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펼쳐낸다. 그것은 양물이 한자 다섯치에 이르는 왕족이 다스리는 거인들의 나라이며, 펄펄 뛰는 생명력의 상징으로 성(性)을 숭상하고 자유로운 성애를 귀히 여기는 생명의 나라이며, 육체를 단련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호방한 정신을 불러들이는 멋과 풍류의 나라다.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사는 듯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이야기를 펼쳐내는 작가의 역량이 놀랍다. 그야말로 '이야기의 힘'이다. 위대한 신족의 나라가 불교라는 외래문화에 밀려 시나브로 변해가는 모습을 추적하는 재미도 자못 진진하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메리 앤 섀퍼, 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사랑스럽고 감동적인 소설. 전쟁 중에 벌어진 비극과 그 속에서 꽃피는 인간애를 감동적으로 그려낸 소설은 많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시종일관 편지로 기막힌 사연을 담아낸다. 편지는 주고 받는 사람에 따라 관점과 입장이 달라지지만, 독자는 다양한 사람이 알려주는 사건들을 통해 전체적인 사연을 조금씩 짜맞추면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상식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발휘하여 애절한 사랑, 아름다운 우정, 인간적 품위와 고결함을 지켰는지 깨닫게 된다. 좋은 글을 쓰려면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고들 하지만, 이 소설은 편지라는 필터를 한 겹 더 동원하여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이 들어설 자리를 넓혀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준다. 표지에는 "우아하고 섬세한 필치로 펼쳐지는 휴먼드라마"라고 되어 있다. 물론 원작이 훌륭하겠지만, 이 책이 정말 그렇게 읽힌다면 재치있고 유머가 넘치는 편지글을 기막히게 옮긴 역자의 놀라운 재능과 수고 덕분이다.
도파민형 인간(대니얼 리버먼, 마이클 롱 지음, 최가영 옮김)
원제는 <The Molecule of More>. 조현병과 파킨슨병에 관심이 많아 언제고 도파민에 대해 공부를 하리라 별렀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진지하게 정리를 해보려던 참이었는데, 번역서가 전자책으로 나와 있기에 얼른 읽었다. 의욕적으로 뭔가를 계획하고 추진할 것인가, 현재에 만족하고 순간을 음미할 것인가. 양쪽 성향이 조화를 이루어야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겠지만, 자신과 주변 사람을 보면 그런 사람이 얼마나 드문지 알 수 있다. 성격과 관계에 대해 온갖 설익은 심리학적, 인문학적 설명이 난무하지만 인간이 결국 물질적 기반을 지닌 유기체임을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이만큼 깊은 통찰을 주는 책도 드물 것이다. 뒷부분으로 가면 약간 산만한 감도 있지만 놀랍고도 재미있는 책이다. 역시 번역이 너무나 훌륭하다. 시원시원 막힘이 없고, 위트가 넘치면서도 전공자답게 정확하다. 존경스럽다.
식물학자의 식탁(스쥔 지음, 류춘톈 그림, 박소정 옮김)

이렇게 많은 항목을 나열식으로 서술하려면 아주 재미가 있거나, 강력한 주제가 흐름을 장악하고 끌고나가야 한다. 이도저도 아니다. 간혹 주의를 붙잡는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읽어내기도 힘들고 읽어도 남지 않는다.
/강병철(소아과 전문의·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