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코로나19가 수그러들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린다. 언제나 그악스런 기세가 꺾일는지 국민 모두가 마냥 속이 타들어간다. 그런 만큼 미소를 짓게 할 산뜻한 얘기로 시작한다.
어느 날이었다. 마네와 돈독한 사이였던 수집가 샤를 에프르시는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어 구매하기로 한다. 작품은 당시 돈으로 600 프랑. 당시에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고흐와 고갱이 아를에 머물 때 화상이었던 테오가 두 사람에게 보내준 한달 생활비가 150 프랑인 걸 감안하면 800 프랑은 몇 달치 생활비니 꽤 높은 가격이다.
흥미로운 건 컬렉터인 에프르시가 마네의 작품값이 800 프랑이었는데도 1000프랑을 줬다는 것. 이 소식을 알게 된 마네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아주 재치있게 작은 아스파라거스를 하나 더 그린다. 그리고 나서 에프르시에게 작품을 보내며 이런 편지를 쓴다.
“당신의 꽃다발에서 분실된 200프랑 어치의 아스파라거스가 여기 있소.”
자신의 작품에 200 프랑을 더 준 컬렉터에 대한 보답이었다. 마네의 재치와 익살이 고단수다. 벽에 바이올린이 걸려 있다. 바이올린을 끌어내려 연주해보려고 손을 뻗었지만, 웬걸, 만져지는 것은 딱딱한 벽뿐이다. 그것은 실물과 똑같이 그려진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실물과 닮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벽에 걸려 있는 듯 핍진하게 묘사돼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아 넘어간다.
이런 그림을 ‘트롱프뢰유(trompe l’œil)’라고 한다. ‘트롱프뢰유’는 ‘속이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tromper’와 ‘눈’을 뜻하는 ‘œil’의 합성어다. 말 그대로 ‘눈을 속이는 그림’으로 실제 물건처럼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을 뜻한다. 한 예로 제우크시스가 그린 포도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새들이 날아와 쪼아먹으려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트롱프뢰유(trompe l’oeil, 눈속임 그림)가 주는 가르침
트롱프뢰유 자체가 화가의 주된 목표는 아니었지만 초기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화가들은 정물화나 초상화에서 대상이 틀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그리거나 벽 또는 천장에 창문의 이미지를 그려 실제로 창을 통해 밖의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만들기도 했다.
실물인 줄 착각할 정도로 잘 그린 그림에 대한 신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해진다. 일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총애를 받던 화가 아펠레스가 암말을 그렸더니 진짜 수말이 올라타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렇다. 서양 사람에 질 리 없는 우리 화가도 있다. 신라 사람 솔거다. 경주 황룡사에 그렸다는 ‘노송도’로 뜨르르한 명성이다.
“솔거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찍이 황룡사의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나무의 동체와 껍질, 가지와 잎의 구부러진 모습 등을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의 새들이 이따금 보고 날아들다 부딪쳐서 떨어지곤 했다. 세월이 오래돼 색이 어두워지자 절의 화승이 단청으로 고쳐 그렸는데 까마귀와 참새 등의 새들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또한 경주의 분황사 관음보살상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도 모두 그의 필적인데 세상에서는 신화(神畵)라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이 노송도는 흔적조차 사라졌다. 「삼국사기」 「동사유고」 「지봉유설」 등에 솔거의 전설만 아련하게 전해 온다. 이처럼 오랫동안 화가란 실물을 꼭 닮게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자, 그래야 하는 존재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전설 속의 그림은 현재까지 전하는 것이 없는데, 트롱프뢰유 그림은 그 도달할 수 없는 전설의 세계에 가 닿으려는 화가들의 노력이 투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사물을 꼭 닮게 묘사하는 것은 라스코 동굴 벽화 이래 그림의 존재이유였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는 더 그랬다. 실물을 매우 닮게 그리기 때문에 화가가 우월한 능력자라는 믿음이 만연했다. 그런데 실물을 꼭 닮게 그려본들 어디까지나 실물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이다. 그러면 여기에 어떻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실물과 매우 닮게 그리거나 만들면 그것이 실물을 대체할 수 있다는, 그것이 곧 실물이 된다는 주술적 믿음이 전제돼 있다.
이처럼 트롱프뢰유는 관객을 ‘속인다’. 관객은 일단 속았다가 곧 가짜임을 알아차린다. 대부분의 트롱프뢰유는 몇 초 만에 그림임이 들통나게 돼 있다. 혹시라도 실제인 줄 알고 지나가버리면, 교묘한 솜씨에 대한 경이로움은 아예 느끼지 못한 채 없어져 버릴 것 아닌가. 그러니 솜씨를 과시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하려면 어찌됐든 교묘한 속임수가 마지막에는 발각(?)돼야 하지 않겠는가. 역설적이다.
“내가 진짜 같아?”- 밖으로 도망쳐 ‘실제’가 되려는 교활한 그림
트롱프뢰유는 서양화의 역사에서 우리 귀에 익숙하지 않은 화가들이 주로 그린 하위 장르의 미술에 속한다. 하지만 트롱프뢰유가 하위 장르라 해서 무가치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서양미술을 관통해온 핵심, ‘3차원의 사물을 어떻게 2차원에 구현하는가’ 하는 문제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3D 영화관에 앉은 사람들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는 영상을 보고 감탄하는 것처럼, 영화는커녕 사진조차 없던 시절의 사람들에게 진짜처럼 묘사된 그림을 구경하는 일은 놀라움과 감탄 그것이었을 게다. 지난날은 ‘잘 그린 그림’이 곧 ‘좋은 그림’과 동일시되던 시절이었으므로. 때문에 화가들이 자신의 능력을 모두 쏟아부어 관객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준 트롱프뢰유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감을 자랑했다.
왜 화가들은 트롱프뢰유를 만들었는가? 왜 (나쁜 뜻이 아니지만) 사람들을 속이려 했는가? 트롱프뢰유는 화가가 실제를 꼭 닮게 그린다는 관념의 산물이다. 실제를 매우 닮게 그리지만 그림이 실제는 아니니까, 얘기인즉 화가는 관객을 감쪽같이 속여야 한다. 그래야 예술적 가치를 얻을 수 있었다. 결국 화가들의 위트와 반전이 담긴 것 아닌가 싶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이자 문필가였던 벤베누토 첼리니는 “미술은 속임수”라고 했다. 미술은 진실을 반영하지만 그 수단은 어디까지나 속임수이고, 트롱프뢰유는 미술이 지닌 속임수라는 측면을 극대화시킨 영역이다. 이런 점에서 트롱프뢰유 장르는 미술가와 미술에 대한 관념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또한 트롱프뢰유는 현실과 환영(幻影)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적극적인 게임이다. 이 게임을 통해 트롱프뢰유는 관객이 현실을 인식하는데 하나의 도구를 제공해 준다.
요즘엔 미술풍토가 진화해 트롱프뢰유 뮤지엄 즉 눈속임 미술관도 상설전시관으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프레임’은 인식의 틀이자 사유의 형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프레임을 통해서만 그림을 그리고 볼 수 있듯 프레임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프레임이다.
이런 프레임의 존재와 의의를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그림을 보고 세상을 보지만, 프레임을 타고 넘는 트롱프뢰유는 보는 사람에게 프레임의 안과 밖, 이쪽과 저쪽을 의식하게 한다. 아울러 프레임이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게 아니라 임의적이고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림이란 실제로는 관객의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따로 존재한 적도 없는 사건이나 사물을 눈앞에 내보이는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증스러운 거짓부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거꾸로도 생각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신묘한 창조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트롱프뢰유는 그래서 그림이 지닌 이러한 가능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장치이다.
어떤 프레임으로 볼 것인가가 진실 깨닫는데 중요

살아가는 동안 과연 우리가 보는 것이 모두 진실인지 돌아보자. 프레임은 이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금껏 우리가 본 모든 것들은 진실이었을까?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다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또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그렇게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보는 것만이, 내가 믿는 것만이 절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래서 어떤 프레임으로 보느냐가 중요해진다.
흔히 현명한 해결책을 구할 때 ‘노인의 지혜’를 예로 든다. “두 마리 말 중 어미와 자식을 구분해 보라”는 수수께끼에 “풀을 줘서 먼저 먹는 쪽이 새끼”라고 답해 목숨을 건진 얘기 등 일화가 수두룩하다. 자주 인용되는 ‘상속의 지혜’도 노인의 현명함 가운데 하나다. 한 노인이 소 17마리를 남기고 죽으면서 유언했다.
“큰아들은 반을, 둘째 아들은 3분의1을, 막내 아들은 9분의 1을 갖도록 해라.”
아버지가 죽자 세 아들은 소를 아버지의 유언대로 나누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나눠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큰아들 몫은 8마리하고 반이니 소를 반으로 나눌 수도 없고, 둘째 아들은 5.666…마리다. 셋째는1.888…마리고.
마침내 아들들은 마을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어르신에게 답을 구했다. 그 어른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빙그레 웃더니 “내가 1마리를 빌려줄 테니 18마리 중 각각 9마리, 6마리, 2마리를 갖게. 그럼 1마리가 남으니, 그것은 원래 주인인 내가 도로 가져가겠네.”라고 했다. 노인의 이 해결책에 세 아들이 무릎을 쳤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건 물론, 원래의 자기 몫보다 더 많은 분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노인이 소 한마리를 더 가져와 세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한 마리를 되가져간 이 해결법은 참으로 슬기롭지 않은가. 노인 자신도 손해를 보지 않았으면서, 세 아들의 고민을 풀어준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비가 내린다. 그런데 수재민들이 느끼는 비와 사막 사람들이 느끼는 비는 너무나 다르다. 짚신장수와 우산장수가 비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처럼 똑같은 현상도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게 수용한다. 하물며 인물선택에서는 모두가 제각각일 터. 제 눈에 안경이다. 허나 정치적 트롱프뢰유에 현혹 당하지는 말 일이다.
요즘 대선과 관련한 관심들이 한창 고조되고 있다. 후보자가 되려는 사람이나 추종자들의 결정이야 자기들의 정치적 현시욕 때문이니 뭐라 관여하고 간섭하기 힘들겠으나 유권자들의 자세는 어때야 할까. 우선 선택에 있어 착각과 편향, 오류를 가장 경계해야 할 터이다.
“역사는 자기가 한 일이 뭔지 모르는 멍청이들에 의해 쓰인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말이다. 이 말은 곧 아둔한 사람들이 역사를 좌우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우둔한 다수가 역사를 어느 방향으로 쏠리게 만든다는 말도 된다. 인류의 역사는 각종 ‘어리석음’과 ‘멍청함’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우둔한 다중이 되지 않으려면 현명한 개인이 먼저 돼야 할 터. 대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마음속에 자리잡는 경각심이다.
‘권력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드는가, 거꾸로 멍청이들이 권력을 더 갈망하는가’라는 알쏭달쏭한 질문에 로버트 서튼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권력은 자제심을 느슨하게 풀어주기 때문에 진짜 인성이 더 쉽게 드러나도록 한다. 멍청이가 권력을 차지할 때도 있지만 멀쩡한 사람도 권력을 갖게 되면 멍청이가 될 수 있다.”
이제 ‘나만 실수투성이는 아니구나’ 하는 묘한 위안 속에 방심하면 안된다. 욕심 많은 데다 멍청한 권력자에게 역사의 방향 결정권이 넘어간다.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