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사건의 진실 밝히는 것은 수사기관의 책무”
실종된 지 24년 만에 잡힌 살인범…공소시효 지나 불송치 예정
경찰의 집념, 24년 전 살인범 잡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소임 다할 것”
전북지역 일간지들, 24년 전 미제사건 해결 발표에 일제히 ‘흥분’
24년 전 전북지역에서 실종된 20대 여성이 살해된 채 암매장된 사실이 이제야 밝혀지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서울에서 24년 전 사라진 여성은 당시 남자 친구에게 살해돼 김제 인근에 암매장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가운데 경찰은 마치 큰 전과라도 올린 양 언론에 알렸다.
그러자 지역언론들은 사건을 재구성하며 마치 방금 일어난 사건을 경찰이 해결한 것처럼 요란한 제목과 함께 당시 상황을 재연하기에 바빴다. 지면에서 온통 흥분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10일 자 전북지역 일간지들 지면에 공통적으로 가득 반영됐다.
전북일보는 ‘사건의 재구성’에서 1997년 겨울로 돌아갔다. 당시 살해범 “A씨(당시 23세)는 여자 친구(당시 28세)에게 ‘부안의 부모님 집에 인사하러가자’고 제안한 뒤 전북에서 올라온 동네 후배 B씨(당시 20세) 등 2명도 A씨의 차량에 함께 탑승했다”는 기사는 “서울에서 부안으로 내려가는 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A씨와 그의 여자 친구는 차량 안에서 다투기만 했다”고 상세하게 당시 상황을 본 듯이 재구성했다.
이어 “A씨가 여자 친구의 외도를 의심한 것이 다툼의 발단이 됐다”며 “차 안에서는 욕설과 막말 등이 서로 오고갔고 그러던 중 A씨가 갑자기 차량을 익산IC 부근에 정차했으며, 이후 A씨는 여자 친구와 계속 말다툼을 벌였고, 홧김에 여자 친구를 마구 때리고 목을 졸랐다”는 등의 상황 설명과 함께 “김제의 한 도로공사현장에 묻힌 진실은 24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더욱 충격적인 내용은 “경찰은 A씨로부터 살해 동기 및 암매장 위치 등 자백을 받고 석방했다”며 “해당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밝혔다.
"수사기관의 책무", "경찰의 집념"...지나친 '과대 포장'
신문은 또 “사건의 진실 밝히는 것은 수사기관의 책무”라는 제목의 다른 기사에서 사건을 수사한 전북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모 경위를 사건 해결의 ‘주인공’으로 소개하면서 박스 기사로 전달했다.
전북도민일보도 이날 경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피해자와 유족을 생각해 유골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현재까지 미해결 살인사건에 대해 단서가 확인되는 대로 실체적 진실발견이라는 수사기관의 책무의 소임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기사에서 강조했다.
전라일보는 ‘경찰의 집념, 24년 전 살인범 잡다’란 제목으로 뽑았다. 그러면서 기사에선 경찰의 발표 내용을 무게 있게 전달했다. 특히 기사는 리드에서 “24년 전 발생한 여대생 살해사건을 경찰의 계속된 추격 끝에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고 전했다.
새전북신문도 이날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소임 다할 것”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비록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사기관의 책무에 소임을 다하겠다”는 경찰 관계자 말을 리드에서부터 상세히 전달했다.

또한 기사는 “24년 전 실종된 20대 여성이 당시 남자 친구에게 살해됐다는 사실이 경찰의 끈질긴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면서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을 할 수 없게 됐지만, 경찰은 피해자 유골을 찾는 등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대신 전달했다.
이처럼 전북지역 언론들은 경찰의 전날 발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느라 바빴다. 24년 전 실종된 여성의 시신을 발굴하기 위한 작업 사진과 함께 경찰이 발표한 내용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당시 경찰이 20대 여성의 실종 신고를 왜 묵살했는지, 실종 신고 된 사건을 수사조차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구심도 없었다. 오히려 일부 서울언론들이 이 문제에 접근해 시선을 끌었다.
일부 서울언론들, 실종사건 신고불구 초동수사 미흡 지적...대조
24년 전 서울서 사라진 20대 여성…"그땐 왜 수사를 안 했을까" -연합뉴스
24년 전 서울 실종 여성…“당시 경찰, 강력범죄 수사 안 한듯” -국민일보

먼저 연합뉴스는 9일 ‘24년 전 서울서 사라진 20대 여성…"그땐 왜 수사를 안 했을까"’란 제목의 기사에서 “서울에서 24년 전 사라진 여성이 남자 친구에게 살해돼 암매장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가운데 당시 경찰이 실종자를 찾기 위한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기사는 이어 “가족의 가출 신고에도 강력범죄를 염두에 둔 수사를 진행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던 기회를 놓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남는다”며 “1997년 서울의 한 경찰서에 A(당시 28)씨가 사라졌다는 가족의 신고가 접수됐지만 이후로 A씨를 봤거나 소재를 알고 있다는 제보는 접수되지 않았고 주민등록증 갱신이나 출입국, 휴대전화 개통, 신용카드 개설 등 생존 반응도 없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미궁에 빠진 여성의 행방은 이로부터 23년 만인 지난해 여름 전북경찰청이 한 통의 첩보를 입수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기사는 “처음 신고가 접수된 서울의 한 경찰서에도 당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이러한 내용도 피의자 진술을 통해서 확인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기사는 “경찰이 가족의 신고를 받았을 때부터 적극적인 소재 파악과 강력범죄를 염두에 둔 수사에 나섰다면, 피의자에 대한 처벌이나 유해 발굴이 지금보다는 순조로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라고 밝혀 전북지역 언론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았다.

국민일보도 10일 ‘24년 전 서울 실종 여성…“당시 경찰, 강력범죄 수사 안 한듯”’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문제점을 짚었다. 기사는 “24년 전 서울에서 사라진 20대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살해돼 암매장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가운데 당시 실종자를 찾기 위한 경찰의 수사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정황이 드러났다”고 리드에서 강조했다.
그런 뒤 기사는 “가족의 가출 신고를 받고도 강력범죄를 염두에 둔 수사를 진행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피해자의 생명을 구할 기회를 놓쳤을 뿐 아니라 공소시효 만료로 범인을 잡고도 처벌조차 못 하게 됐다는 지적”이라고 밝혀 역시 지역언론들과 대조를 보였다.
더욱이 “경찰은 지난해 범인 체포 이후 9차례에 걸쳐 유해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김제의 한 고등학교 인근에서 지질탐사·굴착 작업을 진행했으나 현재까지 A씨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사는 “처음 신고가 접수된 서울의 한 경찰서에도 당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이러한 내용도 피의자 진술을 통해서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며 경찰의 초동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지적했다.
초동수사 미흡, 사회에 미치는 영향 커...언론이 '의문' 가져야 하는 이유
이밖에도 기사는 “경찰이 가족의 신고를 받았을 때부터 적극적인 소재 파악과 강력범죄를 염두에 둔 수사에 나섰다면, 피의자에 대한 처벌이나 유해 발굴이 지금보다는 순조로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종합하면, 이 사건의 핵심은 24년 전 미궁의 사건을 경찰의 노력으로 이제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당시 경찰이 실종자를 찾기 위한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초동수사와 조치 미흡이 한 가족과 우리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언론은 의문부터 제기했어야 마땅하다.
더구나 이 사건은 가족의 가출 신고에도 불구하고 강력 범죄를 염두에 둔 수사를 진행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이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던 기회를 놓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남는다.
경찰의 초동수사도 매우 중요하지만 언론의 사회적 책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계기다.
/박주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