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일본군 기밀 자료를 보면, 백야 김좌진은 키가 장신이요, 눈빛이 강렬해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총명이 출중하고 대화에 능숙했는데, 특히 멋진 유머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백야는 검무에도 능했고, 기마술도 탁월해 달리는 말 위에 우뚝 서기도 하고 가로눕기도 하였다. 어려서는 지산 김복한에게 글을 배웠는데, 지산으로 말하면 을미년(1895년) 홍주 의병을 이끈 선비이자 1919년에는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는 등 구한말의 우국지사였다.

백야는 이런 스승에게서 난세를 헤쳐나갈 길을 배웠다. 청년 백야는 시국의 변화를 주시한 끝에 애국 계몽사상가로 변신하였다. 그는 잔치를 열어 집안의 노비 수십 명을 크게 대접하고 신분의 굴레를 벗겨주었다.

그 뒤에는 향리인 충청도 홍주 갈산리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으로 '호서지역을 밝힐' 뜻을 보였다. 학교는 규모가 상당해, 1908년에는 100여 명이 소학과와 중등과에 재학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조선은 끝내 망해버렸다.

백야는 총독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계획이 탄로되어 적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을 탈출한 뒤 만주로 떠나갔다. 길림성에서 그는 대한독립의군부의 군사령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화룡에 군사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일하였다. 

백야는 이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였다. 훗날 조소앙은 <<유방집>>에 백야의 전기를 실어, 그의 청산리대첩을 상세히 알렸다. 그 기록을 보면, 백야는 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범도 장군과 함께 청산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1920년 10월 18일, 왜군 3개 대대가 쳐들어올 기미가 있자 곳곳에 복병을 배치했다. 첫 싸움에서 백야의 독립군은 450여 명의 왜군을 사살하였다. 적은 혼비백산하였으나, 백야는 그들이 재차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해 독립군을 모두 왜군으로 변장하게 했다.

그러자 왜적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였고, 그 틈에 독립군은 적군 180명을 추가로 사살했다. 10월 22일에는 왜군 1개 연대가 독립군을 세 차례나 공격하였는데, 적은 번번이 패하여 수백 명이 죽었다. 어찌할 바를 로르던 적은 서둘러 퇴각하였다.

그때 백야는 적이 전열을 가다듬어 북산을 기어오르리라고 판단했다. 그러고는 북산을 먼저 점령하였는데, 과연 적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적은 흰 깃발로 군호를 주고받았다. 그러자 백야는 아군도 같은 깃발을 사용해 적진을 다시 교란하였다.

왜적이 다가오면 아군은 말을 걸어 적이 일본말로 응답하기가 무섭게 사살했다. 무려 250여 명을 사살한 다음, 백야의 독립군은 유유히 퇴각했다. 왜적은 그런 줄도 모르고 서로 총격전을 벌여 200여 명이 또 죽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백야의 독립군은 적의 장비도 많이 노획했다.

속사포 5문, 총 30정, 말 20필 등을 얻었다. 왜적은 사상자가 1600여 명을 넘었고, 사망자 가운데는 그들의 연대장과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도 포함되었다. 청사에 길이 빛날 대승이었다. 이후로도 백야는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는데, 1930년 1월 24일에 박상실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때 백야의 나이 42세였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만주로 망명을 떠나며 백야가 남긴 시가 아직도 내 귓전을 울리므로, 한 구절을 적어둔다. 

“삼천리 무궁화동산 왜적이 웬 말인가. 쉼 없이 피 흘려 싸워 왜적을 내쫓고 ... 조국을 되찾으리.” 

임의 혼백이 보시기에 우리는 과연 마땅한 후손일까. 삼가 옷깃을 바로 세운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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