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열심히 닭을 쳤다. 양계는 그의 생계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틈만 나면 이익은 닭의 습관이며 행동거지를 꼼꼼히 관찰했다. 놀랍게도 거기에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이 있었다.

이익은 눈먼 어미 닭의 삶에서 부모의 도리, 또는 정치의 올바른 이치를 깨달았다. 이익은 자신의 소감을 「할계전(瞎雞傳)」, 곧 ‘눈먼 어미 닭의 전기’에 담았다(『성호전집』 제68권). 글의 본모습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소개해볼 생각이다.

외눈박이 암탉은 오른쪽 눈이 멀었다. 그나마 성한 왼쪽 눈은 사팔뜨기였다. 자연히 이 암탉의 행동은 둔하고 부자유스러웠다. 늘 겁먹은 표정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이익의 집안 식구들은 이 닭이 암탉 구실을 못할 거라고 입을 모았다. 내 가슴속에는 가난하고 병약한 이익의 젊은 시절이 외눈박이 암탉과 자꾸 중첩된다.

외눈박이 암탉도 때가 되자 알을 품었고, 새끼 병아리들이 깨어났다. 이익은 그 병아리들을 건강한 다른 암탉에게 넘겨주고 싶었으나, 외눈박이의 신세가 너무 가여워 그만두었다. 동병상린이었을까.

이익의 초년도 그 암탉만큼이나 외롭고, 약하고, 처참하였다. 이익은 근심어린 눈으로 외눈박이를 관찰했다. 그러고는 뜻밖의 결과에 놀랐다. 보통 암탉들은 새끼를 잘 키우지 못했다. 자라면서 병아리의 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외눈박이는 단 한 마리의 새끼도 죽이지 않았다. 가장 약한 어미가 가장 훌륭한 성과를 내다니, 어찌된 것일까? 농가의 상식에 따르면, 어미 닭에게는 두 가지 능력이 필요했다.

첫째, 새끼들에게 먹이를 잘 공급해주는 어미라야 했다. 둘째, 뜻밖의 재난이 닥쳐도 어미가 방비를 잘 해야 했다. 어미 닭은 유달리 건강하고 사나워야 했다. 우리도 세상살이는 그렇게 다부져야 잘하는 줄로 믿지 않든가.

정치 지도자에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민생을 챙기고,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 닭들은 흙을 파헤쳐 벌레 잡기에 분주했다. 날카롭던 부리와 발톱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들은 새끼를 먹여 살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하늘에는 천적인 까마귀와 솔개가 있고, 집안에는 고양이와 개가 호시탐탐 병아리를 노렸다. 나라 안에도 탐관오리와 돈에 눈먼 온갖 지식인이 있듯이 말이다. 이놈들이 불시에 쳐들어오면, 어미 닭들은 사생결단하고 두 날개를 퍼덕이며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이런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아리의 60~70퍼센트는 저세상으로 갔다. 불행히도 세상에는 백성/시민을 지켜줄 지도자가 거의 없다. 이익의 외눈박이 암탉은 달랐다. 몸이 굼떠 멀리 나갈 수 없어서였을까.

그 암탉은 식구들의 보살핌이 있는 마당을 줄곧 떠나지 않았다. 제 힘으로는 새끼들을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없음이 미안해서였을까. 외눈박이는 틈만 나면 새끼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그러자 새끼들이 알아서 제 먹이를 찾아냈다.

가난한 가장의 길이 여기에 있고, 힘없는 회사와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리는 나라의 정치가가 나아갈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외눈박이 닭의 이야기는 곧 이익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는 당쟁으로 인해 벼슬에 나아자지 못했다. 그가 집안을 지키는 방법은 철저한 절약과 검소, 그리고 가족을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아끼고 보살피는 것뿐이었다.

이익은 평생 그런 태도를 지켜 위기에 처한 자신의 가문을 보존했다. 이것이 한 나라의 정치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한국처럼 주변의 초강대국들로부터 압박을 받는 나라일수록 내적 화합과 연대가 필요하다.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스위스 같은 나라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무리해서 군사강국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 구석구석을 더욱더 민주적이고 정의롭게 만들기에 노력한다. 결국에는 이것이 그들의 평화를 지키는 참된 힘이 아니겠는가.

“자식을 기르고 보호하는 방법은 먹이를 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 양육의 요점은 잘 거느리고 정성껏 돌보는 것이다. 암탉이 새끼들을 기르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나는 사람을 기르고 살리는 법을 알게 되었노라.”

눈먼 닭을 통해 이익은 살육이 난무한 당쟁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법을 깨쳤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그는 당쟁의 와중에 유복자가 되었다. 믿고 의지하던 형까지도 목숨을 잃었다. 한평생 소외된 지식인이 성호 이익이었다. 그러나 이익은 날마다 책을 꺼내 읽고 힘써 닭을 치며, 삶의 희망을 끝끝내 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였다. 나는 이익의 <할계전>을 읽으며, 전에 몰랐던 새로운 사실 세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이익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닭을 쳤다는 점이다. 꼼꼼한 학자답게, 그는 닭들의 자그만 행동까지도 철저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이익은 자연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실용의 시대에 한발짝 다가섰다.

둘째, 그럼에도 이익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도덕적 행동이었다. 닭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가 동물의 생태를 깊이 이해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는 동물의 세계에서조차 유교적 덕성이 응분의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런 이익이 유교적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셋째, 하지만 이익은 대다수의 성리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사물의 위상을 위계적이라 믿었다. 초목과 금수는 아무래도 인간보다는 아래였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익은 자신의 관찰을 통해, 동물의 도덕성이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물성(物性, 동물의 본성)이 인성(人性)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고 확신했다. 

<할계전>은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이익 나름의 답변이었다. 18세기 후반, 송시열의 제자인 노론학자들 사이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논쟁이 일어났다. 인성과 물성의 같고 다름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었다. 그 중심에 ‘호론(충청도 측 주장)’과 ‘낙론(서울 측 주장)’이 있었다.

낙론은 인성과 물성은 특별히 서로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이간(李柬, 1677-1727, 호는 巍巖)이 그 편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반면에 충청도의 노론을 대표하여 한원진(韓元震, 1682-1751, 호는 南塘)은 양자의 차이를 강조했다. 

이익은 사실상 이간의 낙론을 지지한 셈이었다. 낙론은 홍대용(洪大容, 1631-1783, 호는 湛軒)에게 이어져 전통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하게 되었다. 즉 오랑캐(夷)와 중화(華)의 본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이념적 장애를 극복하였다.

성호 이익은 북인에 가까운 남인이었다. 그는 이간 및 홍대용 등과 당파는 달랐어도, 그들 모두의 생각에는 큰 공통점이 있었다. 이것이 결국에는 북학파를 거쳐 개화사상으로 피어났다.

※출처: 백승종,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