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왜 우리는 잘 나가는 연예인의 몰락을 보면 박수를 치는 것일까. 그 연예인이 잘 된다고 나한테 불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잘못 된다고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때 인터넷에서 아이돌 그룹 AOA의 멤버들이 역사의식이 부족하다고 호된 질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고 누구인지 몰라봤기 때문이다. 그중 한 사람 인기스타 반열에 올라있던 설현은 집중포화를 맞았다. 많은 네티즌들이 실망· 분노 ·개탄하면서 해당 연예인을 마구 공격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댓글을 단다고 그 네티즌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그 원인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풀이한다. 누군가 미운 사람이 생기면 사실 내 마음도 그다지 개운하고 즐겁지만은 않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불행해지거나 잘못되는 것을 보고 기뻐서 ‘잘코사니야!’라고 외친다.
쉽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타인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감정이 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실력 없이 오만하기만 한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가 무대에서 망신을 당할 때, 기고만장한 정치인의 악행이 까발려졌을 때 누군들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타인의 고통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뜻하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 즉 ‘쌤통 심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렇다고 걱정거리는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 세간의 관심사로 얘기한다면 상황은 좀 달라진다. 유력한 라이벌의 치부나 치명적 거짓이 드러난다면? 경선과 경쟁 상대의 감춰진 비리가 폭로된다면? 그것 샘통! 잘코사니! 샤덴프로이데!를 뛰어넘는다.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다.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 샤덴프로이데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봤을 때 느끼는 기쁨을 말한다. 선한 사람들의 악마적 본성이라고나 할까. 상반되는 뜻을 담은 두 낱말 ‘Schaden’ (손실, 고통)과 ‘Freude’ (환희, 기쁨)의 합성어이다.
독일에서 유래된 용어이나 요즘에는 ‘쌤통 심리’라고 번역돼 곧잘 쓰인다. 우리말 ‘쌤통’이나 ‘잘코사니’와 어느 정도 뜻이 통하는 표현이다. 다만 ‘잘코사니’는 주로 미운 사람이 고통받을 때 쓰인다. 곧 미운 사람이 당한 불행을 고소하게 여길 때 하는 말이다.
이와는 좀 경우가 다르지만, 정반대 이유로(남이 잘 됐을 때)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경우가 바로 ‘사촌이 논(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 해당한다. 모두가 질투와 연관이 깊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인간은 자신이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는 대상을 폄하하고,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볼 때, 칭찬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부위의 뇌가 자극을 받으며 더 강하고 짜릿한 쾌감을 갖게 된다.
다른 사람의 손해나 고통을 보면서 기쁨과 환희를 느낀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험으로 증명됐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다. 자신이 부러워하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5달러짜리 지폐를 주었다는 좋은 소식과 반대로 그 사람이 고급스럽고 멋진 옷을 입고 길을 가다가 차가 지나가면서 물이 튀어서 옷이 더러워졌다라는 나쁜 소식을 들려 주었을 때, 어떤 소식에 더 기뻐했을까 하는 실험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 것 같은가? 우리는 당연히 좋은 소식에 더 기뻐했겠지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질문 분위기를 보면 안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자기가 부러워하는 자에 대한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더 기뻐하더라는 거다.
실험에서만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뉴스 등을 통해 유명인들의 몰락 소식을 접한다. 유명 연예인이나 유명 정치인들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속으로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례로 며칠 전에 모 연예인이 또 생명을 끊었다. 평소에 악행이나 도박 마약 등을 하지 않은 연예인이었다. 그런데 그 소식에 대한 인터넷 댓글에는 조의를 표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말도 못할 악플을 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이 샤덴프로이데, 즉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사촌이 잘못되면 기뻐하는 현상이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다른 국가, 다른 지역, 다른 민족 내에서도 이런 현상은 자주 일어난다. 영어에도 존재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크랩 멘탈리티다. 애당초 가톨릭에서 규정한 7대 죄악 중 하나가 질투인 것만 봐도 서양에서도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질투심을 경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 오래전부터 서양권에서도 질투로 인한 문제가 많이 있었음을 입증한다. 실제로 심리학계에서도 심리학적으로 타인의 행복에 불만을 느끼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에 행복을 느끼는 정서가 있다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경주 최부자 · 거상 김만덕의 미덕 그리워
샤덴프로이데가 타인의 불행에 대한 쾌감을 나타내는 반면 사촌이 논(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은 타인이 잘되는 것에 대한 시기심을 나타낸다.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 주지는 않고 오히려 질투하고 시기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연유는 이렇다.
사촌이 논을 샀다고 기분 좋아 잔치를 베풀었다. 모처럼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아 배고프던 시절이라 다음날 식사까지 잔칫집에서 해결하겠다는 각오로 이판사판 먹어댔으니 결국 탈이 안 났겠는가. 그러니 배가 아픈 거다.
일설에 위 속담의 원래 표현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라도 아파야 한다’였다는 풀이도 있다. 사촌이 잘 되면 축하해 줘야 하는데, 가진 것이 없으니 배라도 아파서 변이라도 거름에 보태야 한다는 뜻이란다. 진정으로 지인들이 잘 되기를 기도하고 함께 축하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경주 최부자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고,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고,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지침을 설파한 것이나 거상 김만덕이 주저없이 곳간을 열어 주린 이웃을 구휼한 것을 보면, 위 속담의 원형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지적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이렇듯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우리가 언제부터 이리도 각박하게 변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회’가 아니라 ‘사촌이 논을 사면 배라도 아파야 하는 사회’를 이룩하는(거름을 보태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싶다
샤덴프로이데와 반대되는 개념으로는 불교의 무디타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Muditā)를 예로 들 수 있다. 무디타는 타인의 행복을 보고 느끼는 기쁨이다. 질투 연구의 대가인 리처드 H. 스미스는 쌤통 심리가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진화를 통해 이 감정을 마음에 새겼다. 실제로 남들의 불행이 우리에게 ‘실질적 이득’을 가져다주기에 이를 ‘기뻐하는’ 감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실수를 한다면? 그는 지위나 명예에 손상을 입는다. 결국 그의 지위가 ‘낮아진 만큼’ 우리의 지위는 ‘높아지는’ 반사 이익이 생길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쌤통 심리의 진실이다.
쌤통 심리의 원동력은 ‘실질적 이득’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평가하는 경향, 그리고 이에 따른 감정적 변화는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대개는 곧잘 남들과 비교한다. 끊임없이 견주고 가름한다.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타인의 불행은 우월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물론 이런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이건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감춰야만 할 듯한 쌤통 심리도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
쌤통 심리가 펼쳐지는 공공의 장은 바로 스포츠 경기장이다. 우리는 쌤통 심리를 강하게 느끼고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사실 이 부분에 이르면 더 이상 “나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저항이 무색해진다. “나보다 차를 느리게 모는 사람은 멍청한 놈, 빨리 모는 사람은 미친 놈 아닌가” 이런 착각 때문에 우리가 자존감을 굳건히 지켜낼 수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사회심리학자 브누아 모닌은 잡식을 하는 사람이 채식주의자와 함께 있으면 그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채식주의자에게 도덕성을 비난받을 거라는 짐작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채식주의자들이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라고 떠들고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돼지갈비를 뜯고 있는 모습을 들켜버렸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이런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의 폭로는 우리의 기를 팍팍 살려준다. 그들에게 열등감을 느꼈는데 사실을 알고 보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이제 누가 더 도덕적으로 우월한가? 이런 역전은 당연히 통쾌할 수밖에 없다. 위선자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건 왜 이리도 통쾌할까?
쌤통 심리의 감정적 출발점은 질투심
스미스는 쌤통 심리라는 감정에 쉽게 ‘악(惡)’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행위를 경계한다. 인간은 기쁨도 불쾌함도, 행복도 분노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며 쌤통 심리는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라는 얘기다. 이 감정을 직시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감정으로 치환되어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쌤통 심리의 밑바닥에는 질투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질투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질투심은 다른 감정의 가면을 쓴다. 가장 손쉽게 쓰는 가면은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다.
우리는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나서 질투 난다는 사실을 직시하기보다, 그를 싫어하는 합리적인 ‘변명거리’를 만드는 데 애쓴다. “걔가 뭐가 잘났어? 부모덕에 호강하는 거지.” “얼굴도 빤질하게 생긴 게 하는 짓도 빤질빤질이야. 얼굴값을 한다니까!” “잘나가면 뭐해, 성격이 그 모양인데. 그렇게 수전노처럼 굴면서 살고 싶을까.”
이렇게 혐오의 가면을 쓴 질투는 조금씩 합당한 이유가 있는 정의롭고 응당한 증오로 변해간다. “부모덕에 잘살면서 평범한 사람들을 무시하다니. 걘 좀 당해봐야 해.” “얼굴만 믿고 쉽게 인생 살려고 하네. 무임승차에도 정도가 있지. 염치없는 놈.” “돈 앞에서 친구고 뭐고 없다 이거야? 자기 잇속만 챙기는 탐욕스러운 자식!”
이제 모든 판이 짜였다. 이 ‘나쁜 놈’은 ‘욕먹을 만’하므로 혐오감과 증오는 정당하다 못해 정의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악한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고 올바른 일이다. 만약 이 악마가 불행을 겪는다면? 인류의 경사에 버금가는 즐거운 일이 된다!
히틀러는 왜 유대인을 증오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질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온갖 방어 전략을 사용한다. (……) 그러니 부러움의 대상이 피해를 입으면 당연히 자업자득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며 정당화한다. 질투 대상을 비난하고 비인간화하고는 그런 대우를 마땅하다고 여긴다.
스미스는 이러한 질투의 치환 과정이 집단적으로 일어난 예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든다. 유대인이 독일 경제·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으로 떠오르자 히틀러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질투했다. 그의 질투는 혐오감과 분노를 거쳐 ‘합당한 이유’가 있는 ‘정의로운 증오’로 탈바꿈했으며, 질투심을 공유하던 독일인들의 마음에서 싹을 틔웠다. 그 후의 비극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히틀러의 경우 자신의 질투를 인정하지 않고도 유대인이 미움받아 마땅한 민족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게 되자 그들을 말살하겠노라고 맹세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맹세했다. 직시하기 괴로운 질투가 ‘분노’로 치환되며 퍼진 비극이 바로 홀로코스트였다.
왜 타인의 불행은 곱씹을수록 통쾌한가? 틈날 때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오늘도 포털 메인에는 기삿거리가 가득하다. 살이 쪄서 후덕한 모습으로 나타난 연예인, 청렴결백을 주장하더니 뇌물 수수로 구속된 정치인, 방역 규칙 안 지키고 술마신 프로 운동선수들과 스님들 등속이 핫이슈다. 딱하고 안타까운(?) 그들 사연에 가볍게 탄식한다.
“아휴, 어쩌다 이렇게 됐어? 쯧쯧. 잘 좀 처신하지 원.”
하지만 이 순간 가볍게 스치는 감정을 리트머스 시험지로 테스트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 결과는 ‘즐거움’에 한없이 가깝지 않을까? 비호감 연예인의 몰락, 라이벌 팀의 실수, 기세등등하던 정치인의 추락, 얄미운 셀러브리티의 사사로운 불행…….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사람 잘못 봤어. 난 그런 사람 아냐”라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심리학자 리처드 H. 스미스는 단언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감정을 타고나며 평생토록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무덤까지 가져간다고.
공정성이 기반인 샤덴프로이데는 부도덕적이거나 “나쁜 것”이 처벌받을 때에 나오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나쁜” 사람이 해를 받거나 처벌을 받는 과정을 바로 보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 나쁜 사람이 벌 받는다. 후련하지 않은가. 여기서 느끼는 샤덴프로이데는 이전에 잘못된 것이 처벌받지 못했던 것을 받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감정을 공정하게 느끼게 만든다.
한 가지 덧붙인다. 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잇단 말 실수는 단연코 “잘코사니야” 소리를 듣고 있다. 아무리 “여의도식 정치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윤 전 총장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빚어진 오해”라는 윤 전 총장 캠프 관계자의 설명에도 상관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 참 쌤통이네”라고 고소하다는 반응들이다. 윤 전 총장은 코로나19 확진자 급증에 따라 “대구가 아니면 민란부터 일어났을 것” “노동자가 주당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쉴 수 있게 해야한다”고 말해 설화(舌禍)를 자초한 바 있다. 자업자득이다.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