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탐구]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
세상이 어지럽고 분망하다. 분망하다 못해 혼란스럽고 어수선하다. 이럴 땐 선이 또렷하고 명징한 삶을 살았던 현인달사들이 그리워진다. 그들의 눈 밝은 삶을 돌이켜보노라면 자연스레 생각의 갈피를 추스르게 된다.
며칠 전 섬진강 끝자락 하동 평사리를 찾았다. 마침 그곳 박경리 문학관을 살펴보면서 박경리 (1926~2008) 선생의 삶을 들여다 봤다. 선생이 남긴 작품 속 언명들이 다시금 귀를 쟁쟁하게 울린다. 박경리 선생은 모두 아다시피 우리 문학의 몇 안되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로 유명하다. 먼저 ‘생명’에 대한 선생의 생각은 이렇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답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 이상의 진실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까지 껴안으며 살아가는 것이다.”(「생명의 아픔」 중)
오늘처럼 사람 목숨이 가볍게 함부로 취급되는 때 새겨들어야 할 언급이다. 고통을 껴안는 자세, 그것이 삶의 진면목이다. 그래야 생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그저 허구한 날 희희낙락한대서야 그게 어찌 값지고 중한 것이 될 것인가. 박경리는 ‘역사’를 우리 몸속에 녹아있는 그런 것으로 여기며 이처럼 풀어낸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토지』 5부, ‘빛 속으로’ 중)
대하소설 『토지』의 엔딩이다. 이 구절 뒤에 <끝>이라고 씌어 있다. 어쨌거나 선생은 역사를 우리나라 ‘광복(光復)’으로 봤다. 1897년부터 1945년까지, 평사리에서 서울과 간도, 일본을 넘나들며 흘러와 하구에 다다른 대하(大河)의 저 ‘거대한 마침표’는 소설 속에서 8월15일(1945년)이었다. 선생의 25년 동안에 걸친 토지 집필도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에 끝났다.
아주 우연이었다. 소설의 대단원과 소설 쓰기의 마지막이 우연하게도 8월15일에서 끝난 것. 당초에는 8월10일쯤 완결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7월 하순 경주에서 열린 문학인 대회와 지독한 가뭄과 무더위, 그리고 낯선 방문객들(기자들 등등) 때문에 늦어지게 됐다. 굳이 8·15에 맞출 생각은 없었다.
사마천의 진실을 기록하는 자세 생각하며 살아
박경리 선생은 시 ‘삶’에서 이렇게 따스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선생은 ‘창조’에 대해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창조적 삶이란 자연 그대로, 어떤 논리나 이론이 아닌 감성입니다. 창조는 순수한 감성이 그 바탕이 돼야 합니다.”(「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중)
이 말이 어찌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될까. 음악이나 미술, 연극 영화 등 모든 예술 종사자는 물론 이즈음 광고, 유투브 등 창조행위를 하는 세상의 모든 크리에이터들에게도 해당되리라. 선생은 ‘하동(섬진강)’을 두고 이런 느낌을 드러낸다.
“섬진강과 해란강이 왜 다를까 하고 생각한다. 아름답기론 섬진강 편이다. 조촐한 여자같이, 청아한 소복의 과부같이, 백사(白沙)는 또 얼마나 청결하였는가.” (『토지』 3부, ‘번뇌무한(煩惱無限)’ 중)
박경리는 섬진강과 그 강이 흐르는 하동을 아름답고 조촐하며 청아하고 청결하게 느끼고 마음에 품었다. 사마천은 박경리 선생에게 외경스런 스승이다. 아마도 집필하면서 글이 잘 안 풀리거나 곤혹스러울 때마다 사마천의 의지와 집념을 되새기지 않았을까. 시 ‘사마천’은 이렇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첫 시집 「못 떠나는 배」의 첫 번째 시, 1988)

선생은 사마천이 얼마나 인간으로서 금욕적 태도를 지녔으면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라 추측했을까. 물론 그만큼 고초를 겪었으리라는 것에 대한 반어(反語)였으리라. 또 얼마나 우러르고 존경했으면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육체와 인생을 거세당하고 견뎌냈는가’하고 경탄과 경외의 치사를 올렸을까.
박경리 선생은 “치욕스런 궁형을 당하고도 『사기』를 쓴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선생 역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서도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낸 대가임에 틀림없다. 그 점에서 사마천을 닮았다.
암과 싸움 끝내자 ‘시대’가 가로막아
“토지는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생명, 그 한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그릇입니다. 나를 오랫동안 누르던 그늘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삶과 생명에의 연민―글쓰게 하는 힘은 바로 그 생명에의 연민이지요.” (‘삶에의 연민, 한(恨)의 미학’ ‘작가세계’ 1994)
‘나를 누르던 그늘’, 자신의 삶에 대해 그처럼 묵중한 입이었던 선생이 그렇게 표현했다. 이 언급 속에 필생동안 얼마나 많은 곡절과 파란이 담겨 있겠는가. 선생에겐들 어찌 신산(辛酸)한 삶이 없었으랴. 단지 그것을 부러 내색하지 않았을 뿐. 1969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무려 25년, 〈토지〉에는 행방불명된 남편의 그늘, 암과의 투병, 시대의 압력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가족사 등이 숨어 있다.
외동딸과 함께 생활하던 43세의 작가 박경리는 궁핍했고 외로웠다. 6.25가 나던 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감되는 도중 행방불명된 남편의 그늘에서 겨우 빠져나왔나 싶던 시절이었다. 작가는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용공으로 몰려 사라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토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는 암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시대적 고통이 마무리되는 순간, 개인적 고통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암 선고(유방암)를 받았을 때 ‘소풍을 가는 기분’이라고 말하리만큼 당시의 현실은 그에게 ‘무거운 바위덩어리’였다. 현실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가슴에 붕대를 동여매고 <토지>를 썼다. 암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한 그에게 다시 ‘시대’가 가로막았다. 남편을 형무소에서 잃은 그는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사위를 생각해야 했다. 선생은 “보이지 않는 압력 앞에서 엎어지듯이” 그 한 시대를 견뎠다.
저 집필기간 25년에는, 운명에서 한의 미학으로, 문명에서 문화로, 거대한 역사에서 민초들의 자잘한 삶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그 모든 것들을 감싸안는 생명론으로 진화를 거듭한 작가의 정신사 또한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 데뷔 직후 조연현씨의 문학강연회에 갔다가 우연하게 청중들에게 털어놓은 이 말을 박경리는 번복하지 않았다. “문학은 불행의 편이고, 문학은 끊임없는 단련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불행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문학보다는 삶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작가‧작품의 존엄성도 중요하지만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더 소중한 까닭이다
선생은 ‘우리들의 시간’에서 속없이 희뜩머룩하지 마라고 일침을 놓는다. 젠체하고 거들먹거리는 값싼 처신을 나무라는 것이겠다. 요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에다 힘을 주든가. 아예 드러내놓고 자기과시를 하며 허세를 부리는 것이 다반사가 됐지 않든가. 또 선생은 우리는 겸손해도 원죄가 있는 존재라며 시간을 아끼라고 타이른다.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쳐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 본들 徒勞無益(도로무익)/ 時間(시간)이 너무 아깝구나”(네 번째 시집 「우리들의 시간」의 표제시, 2000)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 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다. 백 매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나는 주술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는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곤 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은 두렵다. 타협이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 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 한다. (중략)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 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1973년 6월 3일 밤 自序 『토지』 1973. 문학사상사)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지도 한 장 들고 한 번 찾아와 본 적이 없는 악양면 평사리 이곳에 <토지>의 기둥을 세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연치고는 너무나 신기하여 과연 박 아무개의 의도라 할 수 있겠는지, 아마도 그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전신이 떨렸다. 30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악양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 그 땅 서편인가? 골격이 굵은 지리산 한 자락이 들어와 있었다.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이다. 두 곳이 맞물린 형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2001년 12월 3일 序文 『토지』 2002. 나남출판사)
한 순간의 만남도 없었던 곳이 일평생 매달린 큰 작업의 무대가 되다니.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연치고는 너무도 닮은 조건들이 많았다. 박경리와 평사리의 인연은 줄곧 이어져 지금 박경리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박경리 선생은 시 ‘확신’에서 이렇게 준엄하게 꾸짖는다.
“시인들이 너무 많다/ 머리띠 두른 운동가도 너무 많다/ 거룩하게 설교하는 성직자도 너무 많다/ 편리를 추구하는 발명가도 많고// 많은 것을 예로 들자면/ 끝도 한도 없는 시절이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 확고부동하게 옳다고 우기는 사람 참 많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늘어나게 되고/ 사람은/ 차츰 보잘것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뭇 생명들이/ 부지기수/ 몰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땅도 죽이고 물도 죽이고 공기도 죽이고// 연약한 생물의 하나인 사람/그 순환에는 다를 것이 없겠는데/진정 옳았다면 진작부터/세상은 낙원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옳다는 확신이 죽음을 부르고 있다/ 일본의 남경대학살이 그러했고/ 나치스의 가스실이 그러헀고 / 스탈린의 숙청이 그러했고/ 중동의 불꽃은 모두 다/ 옳다는 확신 때문에 타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땅을 갈고 물과 대기를 정화하고/불사르어 몸 데우고 밥을 지어/대지에 입 맞추며 / 겸손하게 감사하는 의식(儀式)이야말로/옳고 그르고가 없는 본성의 세계가 아닐까”

딱 지금의 지구 환경재난, 기후 위기, 생명경시를 꼬집고 있다. 선생은 그래서 묻는다. 대중들이여! 과연 당신의 확신은 옳은 것인가? 그렇다면 세상은 이미 낙원이 돼 있어야지 않겠는가.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