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뜻하지 않게, 잘 알지도 못하는 선비 이야기를 좀 많이 한 편이지요. <조선의 아버지들>을 시작으로, <선비와 함께 춤을>, <신사와 선비>,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등에 이르기까지 참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사실 저는 선비도 아니지요. 선비를 턱없이 미화하는 사람도 물론 아니랍니다. 그저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뿐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한 전통이란 수백년 동안 맥맥이 이어져내려온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전통에도 흉허물은 있기 마련이어서 '단속적(斷續的)'인 성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장난처럼 들린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아마. 그렇지 않아요. 전통의 의미를 되살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이 나타나면, 죽었던 전통이 되살아나곤 하였지요. 그런 일이 우리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권의 책을 쓰며 그런 확신이 더욱 강해지더군요. 앞으로도, 아마 우리사회는 그렇게 꾸불꾸불한 길을 돌고 돌아서 어떻게든지 앞으로 나아가리라 생각합니다.
묻혔다, 일어나고, 또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면서 선비의 전통, 곧 세상을 참되게 만들려는 움직임은 외연이 넓어지고 또 깊어졌어요. 전통은 답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전통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을 열며 새롭게 창조된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선비의 전통이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새롭게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두운 나라를 환히 밝히는 한 줄기 빛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당장에 선비의 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크게 떨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선비라는 말 자체를 몹시 싫어합니다. 거기에도 그나름의 여러 가지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요. 특히 젊은 시민들이 조선의 문화적 전통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은 선비를 싫어하고, 성리학이라면 몸서리를 칩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5백년의 우리 역사를 휴지 조각처럼 함부로 구겨 쓰레기통에 던진다고 해도 아마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제 자신의 모습을 부정해야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자신을 부정한다해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신의 못난 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라야 할 테지요. 제 자신의 장점까지 송두리채 부정하고 말면 새 정체성이 나오기는커녕 제 목을 졸라 죽고 말 것입니다.
고려의 역사든, 조선의 역사든 역사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존재 자체인 점을 놓쳐서는 고난합니다. 저는 부족하기만 한 한 사람의 초라한 학인일 따름입니다.
어찌 제가 많은 시민의 생각을 단번에 바꾸어놓을 수 있겠어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꿈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제 양심과 사소한 지식을 나침반 삼아서 제 생각의 오솔길을 따라 구불구불한 이 길을 언제까지나 한발짝씩 걸어가는 것으로 족합니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 진정한 의미로 향기로운 조선의 선비님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제 마음에 큰 울림으로 남은 그 분들의 언행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인연은 여름철 새벽 풀끝에 맺힌 이슬방울도 같아 동쪽 하늘에 해가 솟으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지만 또 어떤 인연은 태산보다 무거운 것 같습니다.
기로에 선 21세기 한국사회가 선비들이 땀과 눈물로 쓴 고귀한 전통을 이어받아, 소박해도 향기로운 새 세상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설사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