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마음이 흔들리면 활 그림자도 뱀으로 보이고 쓰러진 돌도 엎드린 호랑이로 보이니 이 속에는 모두 살기뿐이다. 생각이 가라앉으면 돌호랑이도 갈매기처럼 되고 개구리 소리도 음악처럼 들리니, 가는 곳마다 모두 참된 모습을 보게 되리라.”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이즈음 자꾸만 되새기게 되는 도움말이다. 세상이 어지럽다. 내 마음이 흔들려서 어지러운가.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싶다.
살기가 팍팍해서, 세상 인심을 감내하기에 벅차 이 땅을 하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세상살이가 그만큼 힘겹다는 말이다. 게다가 도저히 믿기 힘든, 인륜을 저버린 패륜도 많다.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늙은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 있지 않나, 자꾸 보챈다고 어린 딸을 때려죽인 엄마(의붓엄마)가 있질 않나.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어이없는 몰인간의 악행이다. 이런 무참한 일이 허다하다. 어쩌다가 세상인심이 이렇게 됐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흔들리면 돌도 호랑이로 보이나니

그 뿐인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허위는 감춰질 것이라 믿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잇따른다. 아니면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을만큼 극단적으로 고립된 나머지 자포자기하면서 생을 마감하는 이도 있다.
내로라하는 기업의 책임자도 있고 한때 잘 나가던 정치인도 있다. 이런저런 까닭에 세상이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마음을 고요히 추스르려고 해도 들려오는 소식이 흉흉해 평정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세상이 이대로 흘러간다면 아무리 곱게 받아들이고자 해도 마뜩잖은 게 현실이다. 종교적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도무지 이 땅이 따뜻한 세상이라고 내세울 근거가 희박한 형편이 돼버렸다. 이같은 현실이 누구 개인만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황폐하고 삭막하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사회의 행복지수가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극한상황이 깊어져 간다.
이럴 때는 영성이 빼어난 정신적(종교적) 스승의 일갈이 무엇보다 절실할 텐데. 그마저도 기대난망이다. 그악스럽게 뒤틀리고 빗나간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 때문이다. 이럴 때 부드러운 완충 역할을 해줘야 하는 게 정치적 리더들이다. 그런데 극에 이른 정치불신 때문에 그것마저도 기대할 수 없다.
리더의 지도력이 왜 중요한지는 새삼 되뇔 필요가 없다. 위기 상황 속에서 국면을 타개하고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일, 그것이 리더들의 할 일 아닌가. 리더의 자질 중에서도 참모의 조언이나 조력을 분별있게 받아들여야 하는 능력은 매우 요긴하다.
위기 속 국민들 안심시켜야 랄 리더

하나의 사례를 보자. 춘추시대 조간자(趙簡子)라는 임금에게는 윤작과 사궐이라는 두 신하가 있었다. 조간자가 어느 날 두 사람을 평해 이렇게 말했다, “사궐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내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런데 윤작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지 여러 사람이 있건 말건 개의치 않고 내 잘못을 지적한다.”
윤작이 이 말을 듣고 나서 말했다. “사궐은 임금님이 부끄러워하는 것만 신경쓸 뿐 임금님의 잘못을 고쳐드리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임금님의 잘못을 고쳐드리는 것을 임금님이 두려워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있어도 임금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천하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장점을 드러내 과시하고 단점을 감춰 숨기려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단점이란 병과 같은 것이다. 병이 들수록 그 병을 소문내야 명약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등잔 밑이 어둡고, 내가 내 얼굴에 묻은 티는 볼 수 없는 법이다. 내가 지닌 단점 역시 그런 티와 같아서 남이 봐주어야만 찾아내서 털어버릴 수 있다.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초등학생도 아는 이 뻔한 이치를 모르는 게 이 나라 정치인들이다. 내 잘못을 깨우쳐주고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과 내 마음에 들려고만 하는 사람을 가릴 줄 몰라서야 어찌 여러 중요한 국사나 공동체의 과제를 올바르게 헤아릴 것인가.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도 귀담아듣고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면 해당 정치인만의 불행이 아니라 온 국민의 불행이 된다.
사실 나를 비판하는 말이 곱게 들릴 리 없다, 그러나 그것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줄 알아야 수준이 다른 정치인이다. 그래야 모든 국민에게 안녕과 행복이 주어진다. 이 간명한 이치를 정치인들은 어찌 모르는지 아니면 소화를 못하는 건지..
여기에 걸맞은 옛 교훈이 있다. 장자(莊子)가 남의 장례식에 갔다가 마침 친구 혜시의 무덤을 지나게 됐다. 그는 말없이 한참을 서 있다 곁에 있던 사람에게 처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전에 영(郢)이라는 곳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다네. 이 사람이 자기 코끝에 파리 날개처럼 얇게 흰 가루를 바르고 서 있으면 장석(匠石)이라는 사람이 도끼를 휘둘러 그 코에 바른 흰 가루를 벗겨내는 묘기를 부리고는 했다네. 장석은 큰 소리로 기합을 넣으면서 날카로운 큰 도끼를 휘두르며 한참동안 바람을 일으켰지. 흰 빛이 섬뜩하게 지나간 뒤 흰 가루는 전부 벗겨졌지만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네.
바로 코앞에서 날이 퍼렇게 선 도끼가 번뜩여도 영 사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얼굴빛도 태연했다더군. 하루는 송나라 원군(元君)이 그 묘기를 듣고 장석을 불러 시범을 보여 달라고 했지. 장석은 이렇게 대답했다네. ‘도끼를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코끝에 가루를 바르고 서 있던 단짝이 벌써 죽어버렸습니다.’ 나도 혜시가 죽은 뒤로 단짝을 잃었으니 무슨 일을 또 할 수 있겠나?”

그렇다. 장자처럼 자기만이 잘난 것이 아님을 깨우쳐야 한다. 장석이 도끼를 휘둘러 코끝에 바른 흰 가루를 씻어내는 신묘한 묘기를 뽐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있다. 코에 흰 가루를 바르고서 서슬 퍼런 도끼가 번뜩여도 눈 하나 깜작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간 큰 사람이 있어야 했다.
생각해보자. 여기서 누가 주인공인가. 딴은 도끼를 휘두르는 사람일 게다. 하지만 단지 조연처럼 보이는, 혹은 소도구에 불과한 흰 가루칠을 한 사람이 없다면? 도끼잡이 장석보다도 오히려 그 간 큰 사람의 배짱이 더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아무리 뛰어난 도끼술도 그 기술을 발휘할 조건을 만들어주는 단짝이 없다면 초라한 잡기에 그칠 뿐이다.
도끼잡이보다 배짱 큰 표적역할을 기억해야
우리는 감동적인 사연이나 작품에서 그 주인공만을 눈여겨 볼뿐 그 뒤켠에서 애쓴 사람의 피땀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세상 인심이 그렇다. 화려한 꽃을 피우거나 달콤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봐도 마찬가지다. 꽃이나 열매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결실을 얻게 한 잎이나 뿌리, 나무는 아예 뒷전이다.
어떤 사연이나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다. 그 주인공도 중요하지만 배후나 관계 중에 지나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다고 해서 진시황 혼자 이룩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명작 영화 뒤켠에 이름없는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명작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영웅이 된 선수들 뒤에는 코치나 감독, 의료진, 행정요원등 숨은 지원자들의 뒷받침이 따르게 마련이다. 때문에 주인공 못지않은 조력자들의 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력자들이 세상을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요체다.
훌륭한 사람이 꼭 영악하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훌륭한 지도자라고 해서 짐짓 어리숙하고 너그럽기만 한 것이 능사는 아니다. 다음 경우를 보자.
정(鄭)나라 사람 자산(子産)은 유능하고 지혜가 많은 정치가였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자산에게 살아있는 큰 물고기를 한 마리 보냈다. 자산은 연못지기에게 물고기를 연못에 놓아줘 기르라고 했다. 그러나 연못지기는 물고기를 몰래 삶아 먹어 버렸다. 그런 뒤 자산에게 말했다.
“물고기를 놓아 주었습니다. 차음에는 비실비실 잘 움직이지도 못하다가 조금 있자 기운을 차려 활기차게 꼬리를 흔들며 물속으로 헤엄쳐 사라졌습니다.”
자산은 기분이 좋아 말했다. “살 곳을 얻었군, 살 곳을 얻었어.” 연못지기는 나가서 혼자 똑똑한 체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누가 자산을 지혜롭다고 그랬나. 내가 벌써 물고기를 삶아 먹어 버렸는데, ‘살 곳을 얻었군, 살 곳을 얻었군’ 하니 말이야. 하하.”
지혜롭기로 소문난 자산도 연못지기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자산이 그처럼 속았다고 해서 자산을 탓할 필요는 없다. 자산이 그 몰고기에 그다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럴듯한 말로 꾸미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연못지기는 물고기를 관리하고 키우는 사람으로서 그 바탕을 이용하여 속였기 때문에 자산도 속을 수박에 없었다. 지혜로운 사람이 어쩌다 속았다. 그렇다고 해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인심은 오로지 순하고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적절한 경계심과 분별력은 꼭 갖춰야 한다.
거짓말로 덮는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는 과오
요즘 정치의 계절이 오자 너도나도 입지자로 나선다. 그들 중에는 적잖은 과오를 저지른 이들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한결같이 시치미를 떼고 있다. 과오는 잘못이지 거짓이 아니다.
과오는 본의 아니게 범할 수 있지만 거짓은 의도적인 수작이다. 잘못은 거짓말로 덮는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는다. 땅 속에 있는 돌부리도 세월이 가면 드러나는 법이다. 손으로 눈을 가린다고 하늘이 감춰지는가.
정치인들이여! 부디 시간만 흘러가면 모든 일이 흐지부지 마무리될 것이라는 착각을 말아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이다. 그것이 떳떳하게 사는 길이다. 잘못을 덮으려 더 큰 거짓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어찌 떨쳐내지 못하는가.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그다지 밝을 수 없다. 한 개인에서부터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모두에게 적절한 성찰과 뉘우침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때가 언제인줄 아는 사람은 정녕코 세상실이 고수다. 그 고수들이 서늘한 훈수를 둬주면 좋으련만, 고수들은 말이 없다.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