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성의 '이슈 체크'
난데없는 ‘쥴리 논란’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부인이 강남의 유명 호텔 호화 주점의 접객업소 출신이었다는 입소문이 세간의 화제거리다. 호남의 민심은 어떨까. 호남 민심은 쥴리에 전혀 관심이 없다.
호남 민심, 윤석열 징계 사유에 주목하는 이유
대도시로 내몰려 생존권이 위협받는데 지게질이면 어떻고, 버스 안내양이면 어떻고, 남의 집 식모살이면 어떻고, 행상이면 어떻고, 접객업소면 어떻다는 것인가.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직업에 귀천을 논한다면 이는 얼마나 천박한 짓인가. 다른 시도 사람들은 몰라도 호남인들은 오히려 동정심을 보낼 수도 있다. 자신의 가족사일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적절한 사례일지는 모르겠지만, 박정희와 윤보선 후보가 맞붙은 제5대 대통령 선거 때(1963년) 호남에서 박정희 지지가 더 많았다. 윤보선 후보가 남로당(남조선 로동당) 출신이라며 박정희를 몰아 부쳤기 때문인데, 엉뚱하게 박정희 표가 많았다. 왜 그랬을까.
이른바 좌익사범으로 내몰린 가족사를 안고 사는 호남인들에게 남로당 출신인 박정희에 동정표가 쏠렸다. 여순사건, 제주 4.3의 여파가 생생한 당시였다. 차마 입 밖으로 드러낼 수 없지만 마음속만큼은 눈물을 머금고 투표했을 것이다. 호남인은 늘 그렇다. 시대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윤석열 신화'와 진실 게임
쥴리 이슈가 지속된다면 양극화와 불평등에 찌든 호남인들에게는 동정심리가 확산될 것이다. 상대 정당에게는 역풍이 불 것이다. 앞서 지적했지만 가족사의 아픔이 눈에 선한 호남인들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게 사실이라 해도 동정을 살만한 이력이 될 수 있다.
특히 50대 중후반과 60대로 접어든 호남지역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생)는 그런 아픔을 겪었거나 가슴에 담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게 여동생일 수 있고 누나일 수도 있다. 거꾸로 접객업소에서 심부름한 남성으로서 동생이거나 형님일 수도 있다.
그러면 호남인은 무엇에 주목하는가.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윤석열 신화’다. 국정원 댓글수사로 징계와 좌천을 받았다는 ‘정의의 사도’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한 때 부패로 얼룩진 이탈리아 정, 재계를 법으로 엄정하게 다스리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검사가 있었다.
깨끗한 손이라는 의미의 ‘마니 풀리테(mani pulite)’, 즉 부패 추방 운동이 벌어질 당시 피에트로 검사다. 이탈리아 사회지도층의 비리를 뿌리째 뽑아낸 그 검사처럼 국정원의 국정농단을 과감히 털어낸 용기있는 검사 이미지가 윤석열이다. 그리고 국정원 댓글수사의 거침없는 행보가 좌천과 징계로 이어졌다는 게 아직도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그런데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는 윤석열의 징계와 좌천이 “..다른 좀 부적절한 일이 있었고 그것으로 징계를 받은 일이 있고..”(2017년 12월 10일 답변)라며 그 사유를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있었다.
그게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국정원 수사로 인한 불이익인가, 한갓 사생활 문제인가 여부다. 이 답변이 중요한 것은 윤 전 총장의 처가와 17년 동안 송사를 벌이고 있는 정 모 씨의 진정서 회신에도 그런 취지로 답변했다는 점이다.
진정의 요지는 윤 전 총장이 처가를 뒤에서 도와준 탓에 사건이 무마됐다는 것이다. 만약에 징계와 좌천이 처갓집 일 뒷배와 조금이라도 관련돼 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는 윤 전 총장이 공직자로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한 의혹과 직결된다.
윤 전 총장의 신화가 한방에 무너지게 된다. '정의의 사도(?)'가 아닌 몹쓸 공직자로 전락된다. 이는 본인이 아니라도 법무부가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밝히는 방법은 간단하다. 당시 징계위원회 회의자료 공개다.
동학농민혁명-의병활동 깎아내리기, 역사 왜곡
가뜩이나 윤석열 전 총장은 출마 선언에서 호남인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는 호남인들에게 농민혁명과 의병활동을 깎아내리는 투로 죽창가를 탓했다. 자랑스런 호남지역 항일투쟁의 역사를 이념투쟁으로 왜곡, 격하시켰다.
죽창가는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남주의 작품이고, 시와 노래의 시대적 배경은 동학농민혁명이다. 혁명의 불길의 진원지는 호남이지만 전국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줄지어 일어났다.

1894년 3월 전봉준은 김개남, 손화중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에 모여 창의문을 발표했다. 10여일만에 1만여 명이 모였다. 동학농민군은 4개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그 중 하나가 ‘일본 오랑캐를 쫓아버리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하라’이다. 전주성을 함락시킨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군의 침공우려 등으로 서둘러 전주화약을 맺고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집강소를 연다. 집강소에서는 개혁안이 실시된다.
외적과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등 12개 폐정개혁안이다. 그러나 고종이 자기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파병을 요청하자 이를 알아차린 일본군은 즉각 인천에 상륙하고 경복궁을 점령한다. 동학농민군이 2차 봉기를 통해 반외세 투쟁에 나서게 된 까닭이다.
일본의 월등한 화력 앞에 농민군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일본군이 스나이더와 자체 제작한 무라타 소총. 스나이더는 최대 사거리가 천 8백 미터, 무라타 소총은 2천 4백 미터. 화승총과 죽창, 쇠스랑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말 그대로 학살당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전투에서 대패했지만 그 고귀한 희생은 항일의병전쟁과 대일항전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된다.
동학농민군은 처음 무장에서 들고 일어날 때(무장기포), 죽창으로 무기를 만들었다. 법성 용현리의 대나무 밭도 바로 그 죽창의 초기 제조 장소였다. 농민군의 참여 열기는 뜨거웠던 반면 그들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고작 죽창이라니... 그러나 풍전등하에 처한 국운 앞에서 분연히 일어났다. 그들의 넋을 후손들이 기린 시와 노래가 죽창가다. 윤석열은 역사 앞에, 선열 앞에, 호남인 앞에 겸허해야 한다. 조만간 동학농민혁명 참여 유족들의 준엄한 꾸중이 줄을 이을 것이다.
재산형성 과정 깔끔하게 소명해야
호남인들로부터 역사 인식에서 매우 낮은 점수를 받게 된 윤 전 총장. 이제 자신을 추스르고 호남 민심을 얻어가야 할 것이다. 대검찰청의 징계가 처가와 관련돼 있다면, 이는 수사 무마와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수사 무마는 재산형성 과정과 직결된다. 처와 장모가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송사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의 목소리는 윤 전 총장이 처갓집 민형사 사건에 깊숙이 개입돼 있고 든든한 뒷배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경제공동체로서 자신의 당당함을 밝히는 것이다. 호남 민심이 악화되면 지지도, 선호도가 급격히 추락될 것이다. 윤석열 신화의 진실 게임, 재산형성 과정의 갖가지 의혹, 형편없을 정도의 역사 인식 등이 그렇다.
무지한 역사 인식, 호남 민심 돌아서면...
호남인은 다른 지역에 비해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성숙한 곳이다. 어렵게 살아온 가족사를 안고 있다. 국가정책으로도 경부축 중심이었기 때문에 호남 차별은 엄연한 사실였다. 고달픈 인생살이에 지친 호남인들은 접객업소 종사자냐 여부는 관심이 없다.
호남의 정신 중 하나인 ‘불의에 저항’하다 징계 좌천된 게 사실인가. 즉 윤석열 징계 좌천이 국정원 수사 때문인가, 아니면 부적절한 부정행위인가. 그리고 징계 좌천이 71억원에 달하는 재산형성과 연관성은 전혀 없는가.
끝으로 진실 게임이나 재산형성 소명과는 별개로 무조건 빌어야할 일이 있다. 동학농민군-항일의병의 상징인 죽창가 발언에 대해 즉시 고개 숙이고 정중히 사과하는 일이다. 이는 자신의 무지한 역사 인식 수준이기도 하지만 호남인들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기 때문이다. 호남 민심이 돌아서면 누구든 대통령의 꿈은 '일장춘몽'이다.
/김명성 논설위원(전 KBS전주방송총국 보도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