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밴쿠버로 이민 와서 처음 5년 간 선풍기를 딱 한 번 돌렸다.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5년에 한 번. 그러던 것이 차츰 더워져 이제 여름에는 선풍기를 끼고 산다. 하지만 에어컨은 필요 없었다. 에어컨 있는 집도 별로 없고...
김연아가 잊을 수 없는 연기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휘슬러는 세계적인 스키 리조트다. 밴쿠버에서 휘슬러 가는 길은 피요르드 지형을 따라 좁은 바다가 길게 펼쳐지고,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선 산들이 즐비한 절경 중에 절경인데, 이제 여름에는 빙하가 다 녹아 크게 볼 것이 없다.
6월 중순까지 기온이 2월 기온과 비슷한 저온 현상이 계속되다가 6월 말에 갑자기 폭염이 덮쳤다. 이곳은 기후가 여름에도 습하지 않아 30도 정도면 선풍기로도 충분한데, 40도가 넘어가니 무용지물이었다. 벽이 히터처럼 열을 뿜어냈다. 지하에 방이 없었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어금니가 깨져 심하게 이앓이를 했다. 평소 치아 관리를 잘 한다고 자부하는데, 연골이나 뼈를 씹기 좋아하는 습관 때문에 금이 간 것 같다 했다.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손의 건초염, 손목터널 증후군 등으로 통증을 견디는 데는 이골이 난 편인데, 이번 치통은 차원이 달랐다. <마라톤 맨>의 더스틴 호프먼이나 <캐스트어웨이>의 톰 행크스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이제 폭염이 물러가고, 치통은 신경치료를 받고 가라앉았다. 일상이 다시 평온해졌다. 그러나 지구는 기후 위기에 시달리고, 몸은 서서히 노화기에 접어든다. 상황은 언제라도 갑자기 나빠질 수 있다. 젊어서 실존주의에 깊이 빠진 덕에 소멸이나 죽음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삶이란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게임이지만, 질 것을 알면서도 의미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 옮겨 놓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믿는다. 소멸의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할 것.
/강병철(소아과 전문의·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