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일제 강점기에 파인 김동환이란 시인이 있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어느 겨울날, 시인은 아산에 있는 김옥균의 묘소를 찾았다. 밤나무와 잣나무가 무성하게 둘러선 묘소를 참배하고, 파인은 시를 지었다. 마지막 일절은 이러했다.
“동쪽 반도의 이 백성아, 참회의 눈물 크게 흘려/ 가신님 무덤가에 꽃이나 피어드리세 ... 바람은 차고 날은 저문 데/ 까마귀조차 산 넘으니 선생은 누구 더불어 이 밤 지내나." (<김옥균묘>, <<동광>>, 제17호, 1931년)
풍운아 김옥균은 충남 공주시 정안면에서 태어났다. 고종 19년(1882) 8월, 그는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박영효가 쓴 여행기에 뜻밖의 내용이 있다.
일황이 참관하는 가운데 창던지기 시합이 있었다. 일본 무사들 못지않게 김옥균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사화기략>>, 고종 19년 10월 7일)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얼마 전, 김옥균에게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는 국왕 내외와 다음과 같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회고하였다.
“나는 (고종께) 청불전쟁에 관하여 보고하였고, 청나라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아뢰었다. 또, 십여 년 전부터 열강의 정책이 급변해 이제는 옛 질서를 고집하며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기 어렵다고 설명하였다."(<<갑신일록>>, 1884년 11월 29일)
그러자 내실에서 그 말을 몰래 엿듣던 왕후(민씨)가 뛰쳐나와 향후 대책을 물었다. 고종도 맞장구를 치면서 한숨을 쉬었다. 김옥균은 일본의 한반도 전략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장차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서 전쟁을 벌일 것 같다고 예측하였다.
국왕 내외는 사태를 우려하며, 청일전쟁의 결말이 어떠할지를 물었다. “만약 (일본이) 프랑스와 합세한다면 승리는 일본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김옥균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폐하의 측근 신하가 모두 청나라를 섬기며 그 주구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쫓아내소서.”
이번에도 먼저 대책을 주문한 것은 왕후였다. 고종은 김옥균에게 굳은 약속을 하였다. “나라가 위급해지면 경의 정밀한 계획을 따를 터이니 내 말을 의심하지 말라.”
이에 김옥균은 고종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을 글로 적어서 달라고 하였다. 왕은 곧 한 통의 문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마친 다음 옥새를 찍어주었다(<<갑신일록>>, 같은 날).
이처럼 비밀스러운 언약이 있었기에, 김옥균은 안심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가 되어버렸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베트남에서 전개되던 청불전쟁이 의외로 빨리 끝나버렸다는 점이오, 또 하나는 그 영향으로 일본이 조선에서 청과 대적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김옥균에 대한 군사지원을 황급히 철회한 까닭이었다. 끝으로, 정세변화에 당황한 고종과 민비가 권좌를 지키려고 김옥균 등을 배신한 것이었다. 이것이 '삼일천하'의 진정한 이유였다.
그 후 고종은 몰래 지운영 등의 자객을 일본으로 보내어 김옥균을 죽이려 하였다. 후환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이 암살사건이 미수에 그친 다음, 김옥균은 억울해하며 한 통의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렸다(고종 23년).
“신이 여러 해 동안 견문한 바를 토대로 전하께 아뢴 바가 있었는데 기억하시나이까.” 이어서 김옥균은 산업화 시대에 발맞추려면 신분제를 폐지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을 강조했다.
“무식하고 무능한 수구파 대신을 축출하고, 문벌을 폐지하소서." 인재를 뽑아 중앙집권의 토대를 마련하고, 널리 학교를 세워 인지를 개발하라는 간곡한 호소였다. 독립운동가 민영순이 쓴 글에 나온다(<충달공 실기의 거듬>, <<개벽>>, 제4호, 1920년)
하지만 고종은 김옥균의 충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망국의 길을 걸어갔다. 우리 가운데는 김옥균을 친일파로 지레짐작해 매도하는 이도 많고, 갑신정변을 치기어린 궁정쿠데타쯤으로 생각하는 이도 많다. 내가 공부해 보니 사실은 많이 달랐다.
김옥균이 일본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일본에게 우리의 주권을 넘겨줄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고종과 민비가 끌어들인 청나라 군대를 내쫓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무력이 필요하였던 것이고, 앞에서 본 것처럼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고종과는 사전에 충분한 교감을 나누었다.
오늘날에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배신"을 식은 죽 먹듯 쉽게 한다. 사리를 위한 배신의 말로가 과연 어떠할까. 그들이 속셈을 아무리 꽁꽁 숨기려 해도, 역사는 그들의 비겁한 행태를 잊은 적이 없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