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흙으로 그릇을 만들면 당연히 흙은 없어지지만 그릇의 쓰임새는 생겨난다.’(埏埴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노자의 도덕경 말씀이다. 여기서 흙의 역할을 생각해본다. 자기를 내세운답시고 흙을 고집하면 그릇이란 만들어질 수 없다. 자신을 죽임으로써만 또 다른 흙의 쓰임으로 거듭 태어난다. 쉽고도 뻔한 이치다.
허나 사람은 어떤가. 욕망과 탐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온 나라에 넘쳐난다. 요즘 너도나도 대통령에 나서겠다고 야단들이다. 그래서인가. 세상은 콩켸팥켸 뒤죽박죽이 돼간다. 어지럽다 못해 엉망진창이 따로 없다. 도나캐나 국민의 머슴이 아닌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되겠다고 나선 탓이다. 딴에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라고 입에 발린 명분을 내세운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믿음이 안가는 사람도 있다. 어제까지 자신을 길러주고 지켜주던 일터를 떠나 잽싸게 소속을 바꾼 사람이다. 자신을 믿고 중책에 임명해준 임명권자를 거스르고 비판해댄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어찌 신의가 있겠으며 머슴의 정신이 있겠는가. 오로지 자신의 입신영달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 한다. 오언성마(烏焉成馬)-‘오(烏)’와 ‘언(焉)’이 ‘마(馬)’가 된다는 뜻으로 ‘비슷한 글자로 잘못 쓰는 일’-라면 또 모를까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 제 아무리 요즘이 자화자찬하는 시대라고 해도 이치에 닿지도 않는 표현을 자기합리화에 억지로 끌어다 쓰면 지켜보는 이가 헛웃음 친다.
회(悔)의 길, 인(吝)의 길, 사람의 도리
사람은 굶주림에 쫓겨도 오훼(부자)같은 독초는 먹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 우선 배고프다고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주워 먹는다.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자신을 망치고 만다. 결과가 눈에 뻔히 보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때로는 어리석기 마련이어서 뒷날 어찌 되리라는 건 생각지도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눈앞의 달콤한 유혹에 도취된 자에게 어디 내일이 있으며 먼 미래에 대한 안목과 설계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매조지고 지역사회와 나라를 위해 나서겠다는 사람은 모름지기 지켜야 할 기본이 따른다. 진정으로 머슴이 되겠다는 이들은 자신을 잊고 거듭나는 흙의 역할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뿐인가. 독초인지 약초인지를 가려서 먹을 줄 아는 분별력도 갖춰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필요조건이다.
사람의 도리(人理)에는 회린(悔吝)의 변화가 있다고 한다. 후회하고 반성하는데도 사람에 따라 결국은 전혀 상반된 길을 간다는 얘기다. ‘회(悔)’는 후회하여 악(惡)에서 선(善)으로 가는 일을 가리킨다. 반대로 ‘인(吝)’은 잘못해놓고서도 또다시 선(善)에서 악(惡)으로 가는 일을 뜻한다.
그렇지 않던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어떤 이는 뉘우쳐 바르게 변하고 다른 사람은 더 나빠져 패악을 일삼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그 사람이 한 개인에만 머문다면 그다지 크게 걱정할 일은 못 된다. 하지만 그가 어떤 공동체나 국민의 대표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회린의 격차와 파급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 국민의 머슴은 아무나 되고자 해서도 안 되고 아무나 뽑혀서도 안 된다.
“자기보다 백 배 부자면 헐뜯고, 자기보다 천 배 부자면 고용당하고, 자기보다 만 배 부자면 노예가 된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이 돈과 사람의 심리에 대해 압축한 말이다. 같은 논리로 요즘 권력추종의 행태를 바꿔 놓아보면 이렇지 싶다. “자기보다 두세 배 힘이 강하면 헐뜯고, 자기보다 힘이 대여섯 배 강하면 픽업당하고, 자기보다 힘이 열 배 강하면 맹신자가 된다.” 달가운 현실은 아니지만 오늘의 정치판 역학구도는 딱 그만큼이 아닌가 한다.
두 배 강하면 헐뜯고, 열 배 강하면 맹신자가 돼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계속 되풀이 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선전 선동의 악명 높던 나치 시대 괴벨스가 한 말이다. 불유쾌하지만 우리 현실에도 거의 들어맞는 부분이 적지 않다.
나라의 살림은 국가부채가 천문학적인 상태로 늘고, 더불어 청년들의 일자리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워 오포세대를 낳았다. 취업이 어려우니 연애와 결혼, 출산은 포기해야 한다. 나아가 인간관계, 주택 구입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는 암담한 청년들이다.
더해 꿈과 희망 포기로 인한 칠포세대가 됐다. 급기야 이런 저런 것들 모두 포기해야한다는 N포세대에까지 이르렀다. 끝이 어디인지조차 모를 지경으로 암흑이요 막다른 절벽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만은 않으리라고 믿고 싶다. 이럴 때 거짓말을 자주하는 정치인들을 탓하기만 해야 하는가.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는 대중을 탓해야 하는가.
공융(孔融)은 중국 후한 말기의 학자로 공자의 후손이다. 문필에 능해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그러나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조조(曹操)를 비판, 조소하다가 일족과 함께 처형됐다. 때아니게 공융 얘기냐고 의문스러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융에게서는 올곧은 비판정신과 권력 앞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배울 수 있다.
공융은 어릴 때부터 문기와 재치가 뛰어났다. 열 살 무렵 어떤 선비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 때 이 선비가 함께 있던 사람에게 공융의 재주를 칭찬했다. “이 애는 아주 총명하다네. 먼 훗날 나라에 큰일을 할 재목이야.” 하지만 그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어릴 때 총명하던 아이들도 대개 어른이 돼서는 그렇지 못하지.” 이 말을 공융이 들었다. 이내 공융이 되받았다. “그 말씀이 옳다면 어른께서는 틀림없이 어렸을 때는 총명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공융의 재기 넘친 응수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공융은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가 승승장구했다. 당시의 문사들 가운데 특출한 7인을 가리키는 건안칠자 중에서도 공융은 첫손에 꼽혔다.
공융의 우뚝 솟은 문명은 정통성 확보에 고심하고 있던 조조에게도 큰 보탬이 됐다. 그러나 공융은 종종 입바른 소리를 하여 조조의 미움을 사곤 했다. 조조가 술의 폐해를 지적하며 금주령을 내렸을 때 그것이 조조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내린 조치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공융은 이런 글을 올려 조조의 처사를 꼬집었다. “술은 옛날부터 조상을 제사지내고 귀신을 위로하여 사람의 괴로움을 가라앉혀 줍니다. 술이 나라를 망치기 때문에 금주령을 내린다면 여자 때문에 천하를 잃은 자가 있는데도 왜 혼인을 금하지 않습니까?”
또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원소의 며느리를 자신의 맏며느리로 삼아놓고 여론의 지탄을 받을까봐 고심했다. 공융은 “옛날 주의 무왕은 은나라를 친 뒤에 달기라는 미인을 주공(周公)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심 꺼림칙하던 조조는 예전에 유사한 고사가 있었다는 말에 아주 반가워하며 그 출전을 물었다. 그러자 공융의 대답은 엉뚱했다.
“지금의 일로 옛일을 추측해 보았을 뿐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전례가 없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즉, 조조의 떳떳치 못한 처사를 다시 한번 드러내놓고 비꼰 것이 아닌가.
조조가 형주의 유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당한 세객(說客)을 찾고 있을 때였다. 공융은 대쪽같은 성품과 기행으로 이름 높은 당대의 재사 예형을 추천했다. 불려온 예형은 조조를 심하게 욕보인 후 사신으로 형주에 갔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일은 그를 추천한 공융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조조의 장수 하후돈이 형주에서 힘을 기르고 있던 유비에게 참패하고 돌아오자 조조는 몸소 50만 대군을 이끌고 유비와 유표를 징벌하는 장도에 나섰다. 공융이 막아섰다.
“유비와 유표는 둘 다 한실의 종친으로 인망이 높으니 그들을 치는 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조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은근히 유비를 편들면서 조조의 징벌군을 대의명분에 어긋난다고 했으니 과연 무사할 것인가. 조조는 공융을 꾸짖으며 앞으로 다시 공융과 같이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김없이 목을 베리라 하며 못을 박았다.
어질지 못한 군사로 어진 군사 치려니 어찌 패하지 않으랴
공융은 조조의 그같은 꾸짖음이 아니꼬웠다. 가문이나 학식, 문장 등 어느 것을 따져보아도 자신이 조조에게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는 승상부를 나오면서 하늘을 보며 “어질지 못한 군사로 어진 군사를 치려고 하니 어찌 패하지 않으랴”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더 부풀려서 조조에게 고자질했다.
“공융은 평소에도 늘 승상을 욕해왔습니다. 또 전에 죽은 예형이 승상을 욕보인 것도 실은 공융이 시킨 것입니다.”
이제 조조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지난날 예형은 공융을 일컬어 ‘공자는 죽지 않았다(仲尼不死)’ 라고 했고 공융은 예형에게 ‘안회가 다시 살아났다(顔回復生)’고 화답하는 등 둘이서 눈꼴사나운 작당놀음을 하던 일이 생각났다.
조조는 마침내 공융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죽일 결심을 하고 공융의 가솔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공융은 두 아들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가신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두 아들이라도 피신하게 하여 가문을 보전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공융에 앞서 두 아들이 먼저 당당하게 말했다. “둥지가 뒤집히는데 어찌 온전한 알이 남아있을 수 있겠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공융의 일가붙이는 남김없이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고 공융의 목은 저잣거리에 내걸리고 말았다.
그전에도 그랬고 후에도 그러했듯이, 조조는 무장들의 실수나 패전에는 관대했으나 문사들의 실수나 과오에는 비정할 정도로 가혹했다. 난세의 지도자 입장에서 볼 때, 문사들의 이런 행동은 썩은 선비들의 작당놀음이나 유희로 보았던 모양이다.
특히 공융은 공자의 후손이라는 눈부신 가문으로 환관 출신 조조의 열등감을 부채질했다. 또 우레같은 명성과 뛰어만 문장으로 나름대로 문학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조조의 비위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런데다 한조에 대한 충성을 앞세워 조조의 정책과 언동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 조조의 심기를 자주 건드렸다.
조조의 공융에 대한 노여움만이 다는 아니다. 춘추시대 여도담군(餘桃啗君)의 고사를 보자. 미자하가 위군(衛君)에게 총애를 받고 있을 때는,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임금에게 권해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총애가 식자 감히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게 했다 해서 죄를 내렸다. 이처럼 권력자의 애증은 쉽사리 변한다. 오늘날이라 해서 뭐가 다른가.
거울(鏡), 옛 것, 사람은 우리 삶의 세 거울(三鑑)
우리 삶엔 세 가지 거울(三鑑)이 있다. 즉 거울(鏡), 옛 것(古), 사람(人)이다. 이 세 가지 것들은 사람의 심신을 바르게 하는 표준이자 가르침 아니던가. 그런데 이 거울 셋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판에서는 우스꽝스럽고 헛심 팽기고 뻔뻔한 일들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진다.
이 세 가지 것들은 사람의 심신을 바르게 하는 표준이자 가르침 아니던가. 그런데 이 거울 셋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판에서는 우스꽝스럽고 헛심 팽기고 뻔뻔한 일들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진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지켜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이같은 정치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체념해야 하는가. 아니면 삶의 무게에 짓눌린, 그래서 고단하고 힘겨워서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픈 국민들에게 보내는 웃음거리라고 억지춘향으로 치부해야 하는가.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삼켜버리기도 한다. 위정자들이여, 순자의 가르침을 허투루 듣지 말일이다.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민심을 망령되이 끌어다 쓰지 마라. 흙의 쓰임새를 되새겨볼 일이다. 대통령 지망생들이여, 그대들은 더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강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