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주의 '영화 속으로'

'아이들은 즐겁다' 영화 포스터.
'아이들은 즐겁다' 영화 포스터.

가끔 익숙했던 단어가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어린이’가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단어로만 쓰다가 갑자기 ‘아, 어린 사람이라고 해서 어린+이라고 하는 거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렇다면 어른, 성인, 다 자란 사람은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법률상 정해진 나이가 되면? 스스로 경제적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되면? 본인과 타인을 책임질 수 있게 되면?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정의라고 볼 수가 없었다.

백 퍼센트 들어맞는 어른의 정의를 찾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즐거웠지.’라고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나 될까?

아이일 때 정말로 즐겁게 보낸 추억이 있어서 즐거웠다고 단번에 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어른인 현재가 힘들어서 과거를 아름답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삶이란 항상 즐거운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괴로운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즐겁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이고, 무엇일까? 

'아이들은 즐겁다' 영화 중 한 장면.
'아이들은 즐겁다' 영화 중 한 장면.

<아이들은 즐겁다>는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봉한 영화로, 웹툰이 원작이다. 9살 다이는 전학하게 되고, 거기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즐겁게 지낸다. 하지만 다이의 엄마는 어딘가 아파서 늘 병원에 있고, 아빠는 일하느라 바빠서 다이와 함께 있어 주지 못한다. 그러던 중 엄마는 병세가 나빠져 병원을 먼 곳으로 옮기게 되고, 다이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엄마도 아빠도 다이와 함께 있지 못하다 보니, 다이는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혼자 해나간다.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말은 보통 아이들의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워 주는 의미로 대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혼자 무엇인가를 하려 애쓰는 다이를 볼 때면 슬퍼졌다.

아빠와 같이 잠드는 줄 알고 이부자리를 열심히 폈는데 결국엔 빈집에서 홀로 잠이 들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같은 반 아이의 말에 작동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탁기를 돌리며 무거운 빨래를 낑낑 옮기고, 병원에 있는 엄마를 보러 가기 위해 혼자 버스를 타고.

그리고 아이들이 어른들과 주변 환경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도 씁쓸했다. 누구와 어디에서 살지, 어떤 친구를 사귈지, 그 친구와 무엇을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의 감정과 의견은 상관없이 어른의 상황에 맞춰 모든 것이 흘러가고,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따르기를 강요받는다.

‘아이들은 즐겁다.’ 그러나 아이들이 즐겁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이고, 무엇일까?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훨씬 성숙한 존재일 수 있고, 어른이 만든 울타리는 보호와 동시에 제약일 수도 있다. 다이는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화분을 선물하며 약속처럼 말한다.

“여름에 노란 꽃이 피니까, 그때면 엄마 집에 오니까 우리 같이 그 꽃 보자.”

다이의 말에 멈칫한 엄마는 다이 대신 다이가 선물해 준 그 화분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물을 주며 매일 소중하게 키운다. 하지만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엄마는 병원을 옮기게 되고, 화분만 덩그러니 집에 돌아온다. 여름이 되어 노란 꽃이 핀 화분을 들고 다이는 무작정 엄마를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 

영화의 제목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 

절대 안 된다고 말할 게 뻔한 어른들 몰래 친구들과 함께. 길을 잃기도 하고, 어른들에게 들켜 도망치다 화분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다이는 신문지에 고이 싸서 품에 안고 가던 노란 꽃을 다른 꽃이 피어 있는 길가에 심는다. 화분이 망가지고 흙이 떨어져 나갔지만, 새로운 보금자리에 자리 잡은 노란 꽃. 비록 안전하고 보호받는 화분은 아니지만, 그곳은 노란 꽃이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세계다.

이별 후 다이는 엄마가 만든 그림책을 받는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오르는 그 동화를 보며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나오는 ‘구름 나라 엄마 펭귄’ 동화도 함께 떠올랐다. 헤어짐은 슬프지만, 다시 피어날 노란 꽃을 기다리며 함께 했던 즐거운 추억을 먼저 떠올릴 수 있기를. 눈물 흘리기보다 미소 지을 수 있기를.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였다. 제목은 <아이들은 즐겁다>지만, 달콤한 솜사탕만 가득한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아이들은 즐겁다’라는 문장은 단순히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다 자란 어른’들이 ‘아이들은 즐겁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는 숙제를 내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끔찍한 아동학대와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등이 연일 뉴스에 나오는 요즘, 영화의 제목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더욱 간절히 소망해 본다. 

/김명주(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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