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시대상황에 따라 요구되는 리더십이 다르다. 평시에는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이 빛나지만 풍운이 짙어지면 이순신과 백범 김구의 리더십이 그립다.
조선왕조는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한 덕분에 500년의 장수를 누렸다. 내부적 안정성이 탁월했던 반면 외부 충격에 몹시 취약했다. 조선의 이러한 약점이 가장 두드러졌을 때 백범 김구 선생은 동학의 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평민이 운동의 주체였던 동학과 기독교회에서 잔뼈가 굵었던 까닭인지 그의 지도력 역시 평민 중심의 사고에서 나왔다. ‘쟁족’(爭足)의 리더십이었다.
선생은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권모술수를 쓰는 ‘쟁두’, 곧 감투싸움을 싫어 하셨다. 쟁족을 원하셨다. 그것은 힘들고 천한 일을 저마다 먼저 하려 들고 높은 자리 쉬운 일은 서로 사양하는 실천운동이다. 백범의 리더십은 솔선수범으로 부하들을 감복시킨 점에서 이순신과 통한다.
난세의 영웅이 되기를 꿈꾼 박정희는 이순신의 화신인 양 행세했지만 분명히 가짜였다. 그는 국론을 분열시킨다며 소통과 타협을 금지했다.
박정희가 제거되자 세종이 부활했다. 우습게도 전두환 정권이 세종대왕을 제 편으로 끌어당겼던 것이다.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들의 군홧발 소리가 멀어지고 한국사회는 점차 민주화되었다. 그러자 세종이나 정조 같은 명군의 리더십이 다시 각광을 받았다.
우리가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백범의 쟁족운동이다. 높은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한 백범의 진정성을 우리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뉴라이트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백범의 유산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들은 백범의 초상이 든 십만 원짜리 화폐의 발행을 흐지부지 뒤로 미루었고, 백범이 주석으로 있던 임시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정했다.
백범은 쟁족의 정신으로 구국을 위한 죽음의 전선에 앞장서셨으나, 못난 후세의 정치가들은 감투싸움인 쟁두만 일삼는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데만 관심을 가진면 우리에게 과연 무슨 희망이 있을까 모르겠다.

* 오늘은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신 날입니다(1949.6.26). 선생께서 후세에 남기신 빛나는 유산을 잊을 수 없어 몇 줄의 글을 올리는 바입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