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관갑천잔도와 고모성. 

영강 건너 바로 앞이 관갑천이고 푸르게 흐르는 강을 건너야 그 험한 토천, 즉 ‘토끼벼리’에 들어갈 수 있다. 물이 제법 불어서 건너는 것이 만만치 않지만 한번 건너보고 싶다.

영조 39년인 1763년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조엄(趙曮)이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 이 지역을 지나던 상황이 실감나게 실려 있다.

계미년 8월 10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10리를 갔는데, 앞내에 물이 창일하므로 세 사신이 일제히 조련장에 모여 잠시 물이 얕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건넜다. 신원참에 들어가 말에게 죽을 먹이고, 수탄(戍灘)에 이르니, 물살이 거센데다가 길고 넓었다.

그런데, 본 고을원이 월천(越川)하는 역군을 많이 준비해 놓지 못하여 간신히 건너는데, 일행 중의 인마(人馬)가 더러 넘어지는 자도 있고, 더러는 떠내려가는 자도 있었다. 나는 먼저 건너가 언덕 위에 쉬면서 다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해가 이미 어두워져서 사세가 미칠 수 없기에, 건너지 못한 사람은 신원참으로 되돌아가 묵게 하고 이미 건넌 사람만 거느리고 유곡역에 당도하니, 밤이 3경이었다.

지금도 다리가 없으면 오도 가도 못하거나 돌아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아무리 말을 타고 건넜다 해도 강물이 깊거나 물살이 세면 강을 건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이 철철 넘치는 징검다리를 지나 옛길에 들어서면서 '이 길이 과연 영남대로였을까?'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물음에 답을 해줄 만한 어떤 문헌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속의 길들이 이렇게 좁고 보잘 것 없었을까 하는 데 대한 의문도 계속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19세기말 러시아 사람으로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했던 루벤쵸프의 글을 읽으면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한국과 같이 인구가 조밀한 나라에 주민생활의 동맥이 되는 도로가 이처럼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도로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주민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수준에 있었고, 앞으로도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수 백 년이 흐르는 동안 도로의 상태가 나아졌다고 보여 지는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중략)

도로를 닦는다든가 포장한다든가 하는 기술이 한국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도로들은 그 도로에 접해있는 지역의 토질과 동일한 성질을 띤다.“

한말의 풍운아인 김옥균은 우리나라 도로의 열악함을 잘 알고 잇었ㄷ너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치도규칙(治道規則)』에서 조선의 도로 근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나라는 조종조(祖宗朝)에서 나라를 세우고 법을 정할 때에, 도로와 교량을 닦고 다스리는 일은 공조(工曹)에 맡기고 또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여 내와 도랑을 파는 일을 맡게 했으니 그 규모가 치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풍속이 타락해진 후 그대로 습성이 되어 비록 자기 몸에 직접 관계되는 것이라도 우물쭈물 그대로 넘기는 것을 능사로 알고 있다.

령 농사짓는 것이 일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지라도 운반이 불편하다면 양식이 남는 곳의 곡식을 모자라는 곳으로 옮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길을 닦는 일이 시급히 요구 된다. 길이 이미 잘 닦여져 차마(車馬)가 편히 다닐 수 있게 되면 열 사람이 할일을 한 사람이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 아홉 사람의 힘을 공업의 기술로 돌린다면, 예전에 놀고먹기만 하던 무리들은 모두 일정한 항구적인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김옥균은 열악한 도로를 제대로 닦는다면 많은 사람의 노고를 덜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여러 직업을 만들어내서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갑천(串岬遷)은 용연 동쪽에 있고 토천(兎遷)이라고도 부른다. 돌을 파서 사다리 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에 이른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길이 없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북쪽의 깎아지른 벼랑에 돌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지키던 고모산성이다'는 기록이 있다.

“어허야아! 위태롭구나, 높을시고, 촉나라 길은 어렵다.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도 어렵다.(중략) 하늘에 닿은 사다리와 돌로 쌓은 잔도(棧道)가 차츰 놓였다. 위로는 햇님의 수레도 돌아가는 봉우리가 있고, 아래로는 세찬 물결이 거꾸로 흐르는 소용돌이가 있다. 노란 두루미의 날개도도 지나가지 못하고, 원숭이의 재주로도 기어오르기가 어렵다.(중략) 한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도 꿰뚫지 못한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의 절창 <촉도난蜀道難>에 실린 것 같은 곳이 관갑천잔도다. 자연 암벽이 갈라져 고갯마루를 이룬 고개인 이 관갑천 잔도가 『한국지명총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틱재이배리:(톳재이벼루. 토천. 곶갑천) 곶갑원 터 아래쪽에 있는 길로 길이가 약 2키로 쯤 되는데, ‘톳재이’(토끼)만 다닐 수 있을 만한 배리(벼랑)로 된 좁은 길이다. 고려 태조가 신라를 치러 가는데, 이곳에 이르러 길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산토끼 한 마리가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 토끼를 따라 길을 찾았다고 한다.

이 잔도에서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수도 없이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밟아서 반질반질한 바위로 된 고개를 넘자 영강의 물길이 그림처럼 휘어 돌고, 고모산성이 바로 지척이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옛길이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황송할 일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의 길, <영남대로>나 <삼남대로> 또는 <관동대로>를 걷지 않고, 편하고 잘 닦여진 길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고 있으니. 

 /사진·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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