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명 저자와 대화,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
500년 조선사를 가로지르는 명문장 이야기 책,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글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문인부터 새 시대의 문장으로 성리학 바깥세상을 꿈꾼 신지식인까지, 역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구한 편지 한 장부터 붓을 꺾지 못해 고난을 자초한 절개 높은 상소문까지.
문장이 담은 시대의 풍경과 시대가 탄생시킨 문장가의 사연을 생생하게 복원한 수작으로 사람과 시대, 미시사와 통사를 아우르는 독보적 역사가 백승종 교수의 500년 조선사를 가로지르는 명문장 이야기이다.
전북 출신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 끊임 없는 집필 활동...SNS 소통·공유
“한 장의 글로 누군가는 출세를 하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는 책의 저자인 백승종은 전북 출신으로 역사학자이며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이다.
그는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연구원과 독일 괴팅겐에 있는 막스프랑크 역사연구소의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튀빙겐 대학교 한국학과에서도 수년간 재직했다.
우리나라 미시사 연구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저자는 일제시기 평민 지식인 이찬갑의 내면 세계를 탐구한 본격적인 미시사 연구서인 ' 나라의 역사와 말' 비롯하여, 희귀한 사진을 심층 분석하여 1950년대 북한의 실정을 밀도 있게 분석한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신세대 대학생들과 함께 만든 미시적 한국현대사 '아버지 난 누구예요', 15~19세기 전라도 태인현 고현내면의 사회사를 독특한 연구방법으로 조명한 '한국사회사연구'등을 저술했다.
그밖에도 서구 미시사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 '미시사와 거시사'를 번역했다. 최근엔 ‘세종의 선택’ 집필을 완료하고 곧 출간할 예정이다. 왕성한 집필 활동과 <전북의소리>에 '역사칼럼'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SNS 등에서도 풍부한 역사 지식과 지혜를 널리 공유하는 백 교수를 만나보았다.
다음은 그의 저서에 관한 궁금증을 일문일답식으로 주고받은 내용 중에서 간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주
“조선 500년을 움직인 명문장들 직접 소개하고 느낌 적어”
Q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이란 책의 제목이 역사서와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닌 것처럼 특이합니다. 제목을 그렇게 붙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A 맞아요, 지난해 제가 낸 책의 제목이 좀 특이한 것이 사실이지요. 평생 역사 공부를 하다 보니, 조선왕조처럼 문장을 중시한 나라가 없었다는 깨침이 왔어요. 조선 시대의 이름난 인물치고 문장가가 아닌 사람이 없었지요.
이름난 신하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어요. 임금님 가운데서도 정조는 100권이 훌쩍 넘는 저술을 후세에 남겨 놓았어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장군도 <난중일기>를 ‘이충무공전서’라는 문집이 있을 정도지요. 그래서 저는 바로 그런 문장을 중심으로 조선 500년의 역사를 정리했지요. 그런 가운데 이 책에서 저는 시대를 움직인 명문장을 직접 소개하고 저의 느낌을 적어두었습니다.
Q 조선사를 가로지르는 명문장 이야기들이 많이 담긴 역사책을 마주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책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주신다면요?
A 크게 보아서 이 책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지요. 제1부에서는 문장의 역사를 썼어요. 모두 여섯 개의 시기로 나눠보았지요. 고려말부터 시작해서 성리학적 국가 조선이 기틀을 다지고, 서서히 변모를 거듭하다가 마지막에 근대 서구에서 발원한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질 때까지를 다루었어요. 문장가들의 미학이 달라지고 세계관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짚었어요.
"옛 문장의 세계 파고들어가면 옛 삶의 현장 가슴에 다가와"

제2부는 조선의 훌륭한 문장을 다섯 개의 주제로 나눠서 살폈어요. 그들은 사랑과 우정에 대해서 어떤 글을 썼을까도 궁금했기 때문인데요. 그때 지식인들은 답답한 현실정치를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결국 마음을 다잡고 붓을 날카로운 무기로 삼았어요. 그들의 문장 세계를 파고들어가 보면 옛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가슴에 다가오지요.
조선시대는 사실상 19세기로 막을 내렸어요. 허나 선비들이 남겨놓은 산더미 같은 문장을 헤집어보면 여기저기에서 생기를 뿜어내는 영롱한 보배들, 명문이 퍽 많아요. 21세기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좋은 글이 참으로 많습니다.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Q 조선시대 사람들의 문장을 많이 소개하셨는데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좋아하는 문장들이 달랐을 텐데 특히 서민층은 어떤 문장들을 가장 좋아했을지 궁금합니다.
A 이 책에서는 주로 선비들의 문장을 소개했어요. 시기(詩妓), 시를 짓는 기생의 글도 나오고 시승(詩僧) 즉 시에 능통한 스님들 이야기도 좀 나오기는 해요.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면 선비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요. 서민들이 즐긴 문장, 그들이 쓴 문장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한권의 책을 쓰고 싶어요. 선비들의 문장취향과 공통된 점이 있었으나 물론 차이점도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가령 서민은 보다 더 생활에 밀착된 표현을 좋아하였고, 해학적인 성격이 강했잖아요. 이점은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봅시다.
Q 이 책 2부에서는 훈구파의 거두이자 문단의 거장 서거정이 아내와 술잔을 기울이며 남긴 소탈한 한시와 옛 문인의 초상화를 벗 삼은 허균의 우정담, 난세를 외면하지 못한 문장가 권필과 백인걸의 피어린 상소문 등을 소개하셨는데, 요즘 세상에 독자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분야와 문장이 있다면 한 가지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A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워요.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마음에 와 닿는 글이 다를 것 같아요. 글이라고 하는 것이 독자의 처지와 거리가 가까울수록 호소력이 있어서 좋지요.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처지와는 무관한 것이라야 위로가 될 때도 있어요.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손길 가는대로 읽어도 좋아요. 이책에 실린 이순신의 우정담이든 실연한 어떤 사람의 한 많은 애정담이든, 또는 허균의 심오한 미학 담론이거나 백인걸과 조식의 현실비판을 담은글 가운데서 무엇이든 골라서 읽어도 마음에 여운이 남지 않을까요.
“하고 많은 유배생활도 능지처참도 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아...조선은 그야말로 문장의 왕국”
Q "한 장의 글로 누군가는 출세를 하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는 문장이 가슴에 많이 와 닿습니다.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요?
A 문장을 잘 지으면 출세를 하던 시절이 바로 조선시대였지요. 그런 점에서 한 장의 글로 출세를 한다는 말은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지요. 문제는 목숨을 잃는다는 부분인데요. 실제가 그랬어요. 석주 권필은 풍자시 한편 때문에 죽었거든요. 하고 많은 유배생활도 능지처참도 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어요. 조선은 그야말로 문장의 왕국이었어요. 고려도, 신라도, 그 만큼 문장을 중시하지는 않았지요.
Q 이 책을 만드시면서 많은 고서와 문헌들이 참고자료로 활용됐을 것 같은데, 참고하신 서적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A 저도 무어라 답을 못하겠어요. 평생에 읽은 책이며 조각 글을 바탕으로 책을 쓴 것이니까요. 옛말에 장부는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한다던데, 글쎄요. 꼭 그만큼은 아니어도 지금까지 제가 읽은 책을 수레에 실으면 얼마나 될까요. 두어 수레쯤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Q ‘세종의 선택’이란 제목의 책이 곧 출간된다고 들었는데 책은 언제쯤 나오게 되며 내용을 소개해 주시지요?
‘세종의 선택’ 곧 출간...정치가 세종은 과연 어떻게 평가를?
A 책은 아마 6월 말쯤 출시될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의 선택'에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딱 한 대목만 소개할까 합니다.
"세종 말년이 생각난다. 나는 그 시절이 왕에게 매우 불안한 시간이었다고 본다. 대리청정을 맡은 세자(문종)는 유약하기 그지없었고, 왕이 젊은 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여 키운 집현전은 특권적인 정치세력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 오게 만든 것은 세종 그 자신이었다. 왕은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강조하였고, 그러려면 언관(言官)이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기에 집현전을 사헌부 사간원과 동렬에 서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말년에는 다름아닌 집현전이 사사건건 왕을 물고 뜯었다. 특히 학사 이계전 등은 왕의 주요 업적을 낱낱이 따지며 뼈아픈 비판을 쏟아냈다.
그들은 세종이 평생을 바쳐 이룩한 조세개혁, 즉 “공법”의 시행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였고, 지방관을 임지에 오래 근무하게 하는 “구임법”도 실패한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사민정책도 원천적으로 부정하였고, 북방의 방어용 성곽 수축까지도 쓸모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실록>>, 세종 28년 5월 3일; 같은 해 6월 18일 등).
그럴 때마다 왕은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침울한 심정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정치가 세종의 말년은 우리가 지레짐작하는 것처럼 백성의 넘치는 칭송과 쏟아지는 박수 갈채 속에서 하루하루 보람을 느끼게 되는 아름다운 시간이 아니었다.
후세는 세종을 “성군(聖君)”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현왕(賢王)”이라고도 한다. 그가 통치하던 때를 서슴지 않고 “태평성대”라고 평하는 이도 많다. 심지어 그때는 국경 밖에 살던 이민족까지도 왕의 덕을 흠모하여 우리나라에 귀순하였다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정말일까. 그때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근심 걱정 없이 호의호식하며 유유자적하였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상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이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세종 때도 많은 백성은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세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자비롭고 슬기로운 그 임금님의 모습은 장차 어떻게 해야 할지 의문이 들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세종의 시대란 실상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일까."
Q SNS에서 책 표지를 놓고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떻게 결정하셨는지요?
A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택으로 표지를 확정하게 되었어요. 정말 많은 분들이 다양한 의견을 주셨어요. 그 가운데서 두 번째 표지를 선택하신 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우출판사는 2번 표지(위 사진)를 더욱 예쁘게 가다듬었답니다. 재삼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세종의 선택’ 얼굴을 미리 보여드리게 되었어요.
"평소에 좋은 문장을 좀 더 많이 읽을 수 있으면..그럼 우리 삶이 더욱더 진실하고 멋지게 변할 것 같아"
Q 앞으로 후속편이 나올 법도 한데 계획이 있으신지요?
A 그러게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서민들의 문장, 여성의 문장, 아이의 문장, 개화기의 문장 등. 따지고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 되는 일이지요. 이번에도 실은 김영사의 고세규 사장님이 몇 번을 강권하셔서 쓰게 된 거지요. 참으로 감사한 인연이지요.
Q 끝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간략하게 부탁드립니다.
A 요즘도 우리는 문장을 참 많이 쓰고 삽니다. 문자에 카톡, 페이스북, 댓글, 이메일 등,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처럼 문자 생활을 기꺼이(?) 즐기는 나라가 별로 없지요. 진실을 표현한 글은 다 명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장가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시민들이 평소에 좋은 문장을 좀 더 많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우리 삶이 더욱더 진실하고 멋지게 변할 것 같아요. 안 그런가요.
/박주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