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번역서가 나왔습니다! 감염병과 인류가 얽혀온 과정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이만한 책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특히 이 책은 지구에서 단세포생물이 출현한 순간부터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가 왜 아프리카를 벗어났는지, 다른 대륙으로 퍼져나가면서 미생물과 우리와 다른 동물이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농경의 시작은 어떤 전염병을 우리 안으로 불러들였는지, 전쟁과 교역과 교통의 발달은 미생물과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등을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비슷한 시각으로 씌어진 책도 몇 권 더 있지만, 이 정도로 짧은 분량 속에 정제된 내용을 전문적이면서도 알기 쉽게 쓴 책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체적인 역사를 조감하는 데 이 책, 1970년대부터 21세기를 맞기 전까지 상황이 어떻게 달라져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알려면 Laurie Garrett의 <Coming Plague>,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인수공통>을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사를 통해 세상을 보지요. 그 서사가 잘못되었다면 어떤 문제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중요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옮긴이의 말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인간이 미생물을 발견한 것은 약 350년 전의 일이다.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임을 깨달은 지는 150년 남짓이다. 무엇이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인간은 즉시 미생물을 적으로 간주했다. 안온한 삶을 지키고, 지구상 모든 것을 마음대로 이용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판단한 것이다.
미생물이 일으키는 감염병을 백신과 항생제로 상당 부분 관리하게 되면서 인간의 교만은 정점에 달해, “이제 우리는 감염병이란 책을 덮어도 될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저자가 코비드19 시대를 맞아 이 책에 다시 주목하기를 촉구하면서, 서두부터 이런 교만을 상기시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장이 가장 중요하다. 미생물의 역사는 40억년, 인류의 역사는 20만년이다. 생명의 역사를 하루로 축약한다면, 인간은 마지막 2~3초 사이에 나타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인공인 줄 안다.
진짜 스토리는 이렇다. 미생물은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의 환경은 물론, 우리 몸의 표면, 몸속에도 존재한다. 알고 보니 우리 유전자 속에도 무수한 미생물의 유전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은 우리의 조상, 조상의 조상, 진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기원이 되었던 무척추 동물이나 원시적 다세포 생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존재하고 미생물이 우리를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현재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이 미생물이라는 바다에서 잠시 일었다가 거품을 남기고 사라지는 파도에 불과하다. 올바른 서사를 통해서만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강병철(소아과 전문의·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