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서 묻고 또 물어서 깨달은 결론은 진정성이다. 말을 아무리 잘 해도, 글을 아무리 잘 써도 그 말이나 글에 진정성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다 헛되고 부질없다는 것을 오랜 세월 살아온 내력으로 터득한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나, 살아가는 것이나 또는 마지막에 돌아가는 것,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닌 진실에서 연원하는 것과 같이 살아가면서 행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어디 한 가지도 버릴 것도 더할 것도 없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문득 문을 열고 나가면 만나는 사물들, 그 사물들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그때 그 시간이 본래의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사물들이나 나 자신을 본래 그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도처에서 손톱으로 건드리면 그냥 부서질 듯한 얇은 햇빛의 막이 만물을 영원한 미소로 옷을 입힌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뭇잎들과 햇빛의 유희 속으로 빠져드는 것 밖에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는 이 햇살, 대기 속에 숨 쉬고 있는 이 부드러움, 이 은근한 열정, 그 자체가 되는 것, 내가 나 자신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필시 이 빛의 저 한가운데서일 터이다.
이 세계의 비밀을 열어 보이는 이 미묘한 맛을 이해하고 음미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이 세상의 저 밑바닥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 다시 말해서 나를 무대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이 극도의 감동, 잠시 후면 또 다른 사물들,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휘어잡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책갈피에 꽃잎을 끼워두듯이 나로 하여금 시간의 천에서 이 순간을 오려 낼 수 있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던 어느 날의 산책길을 그 꽃잎 속에 간직해둔다. 그리하여 나 또한 산책을 한다. 그러나 나를 쓰다듬은 것은 어떤 신이다. 진종일 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나더러 매우 활동적이란다. 오늘은 잠시 발길을 멈춘 정지다. 그리하여 내 가슴은 나를 만나러 간다,
아직도 어떤 불안이 나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잡을 길 없는 무형의 순간이 수은 방울들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하는 이들을 가만 놓아두라. 나는 나 자신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있기에 이젠 더 이상 불평이 없다. 나는 이 세계 속에서 행복하다.
나의 왕국은 이 시계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구름, 사라져 가는 순간, 나 자신으로부터의 나의 죽음, 책을 펼치면 좋아하는 한 페이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 이 세계라는 책에 비긴다면 그 페이지는 얼마나 김이 빠진 것인가.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 고통은 곧 이 태양이요 이 그림자들이요. 이 열기요. 저기 아주 멀리, 대기 깊숙한 데서 느껴지는 쌀쌀한 기운이니 그 고통이 나를 도취시키게 하라. 하늘이 그 충만함을 쏟아 붓고 있는 이 창에 모든 것이 다 쓰여 있는데, 무엇인가가 죽는가, 인간들이 고통스러워하는가 하고 자문해서 무엇 하리.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것이 되는 것, 단순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고, 또 잠시 후에 말하리라.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거기에 쓰여 진다. 인간성도 진실도 그런데 내가 이 세계일 때보다도 내가 더 진정하고 더 투명해지는 때란 언제일까?“
알베르 카뮈의 <작가수첩>에 실린 글이다.
그런데 알베르 카뮈도 나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인간적이 된다는 것은 단순해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진실해지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가끔씩 쉽지가 않다. 내가 나에게도, 그럴 진대, 하물며 타인이나 세계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 하랴.
단지 조금이라도 더 진실하게, 단순하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그러면서 나를 다그치고, 윽박지르면서 계속되는 삶, 그 삶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끝이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렇게 살아가는 어느 시간에 카뮈가 말한 것처럼, ‘사랑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던 어느 날의 산책길’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수많은 ‘꽃잎들(어느 순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책이 되는)’에게 나는 어떤 말을 건네고 지나갈 것인지.
/사진·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