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노비 제도를 가리켜 천하에 다시없는 악법이라 규탄했다. 즉각 폐지하기가 어렵다면 우선 인신매매라도 금지하자고 주장했다(<<성호사설>>). 물론 이런 올바름 그대로 통할 리 없는 세상이었다. 노비란 양반들에게 일종의 필수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이틀된 것이 아니라, 조선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관습이었다.
“우리나라는 벼슬아치가 모두 나무 하고 물 긷는 수고를 노비에게 대신하게 함으로써 염치를 기를 수 있게 되니, 그들에게 의지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성종실록>>에 나오는 대신 양성지(1415-1482)의 말처럼 양반들에게 노비는 수족과도 같았다. 그 수도 많아 성종 때는 전체 인구의 3할쯤이 노비였다.
노비가 이렇게까지 늘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양반들이 갖은 방법으로 노비의 수를 늘리기에 애쓴 결과였다. 이에 관하여 이익은 양반들이 저지른 한 가지 불법적인 방법이라며 ‘양호의 폐단’, 곧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과 부역을 책임지면서 그들을 노비로 삼는 관행을 고발하였다.

“남주 곧 남부지방의 향곡(시골)에서 힘을 믿고 멋대로 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양호(養戶)의 폐단을 낳는다. 지방수령 곧 ‘수재(守宰)’는 자주 갈리고 호민(세력 있는 양반)은 항상 머물러 있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윗사람은 속일지언정 감히 그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큰소리로 한탄하기를, ‘강물은 흘러가도 돌은 굴러가지 않는다.’ 한다. 이는 과거에 내려온 수령이 지금의 수령은 아니지만, 호민 곧 세력 있는 양반은 항상 그 곳을 지키며 산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모든 백성이 신역(身役)을 피하고 부세를 면하기 위하여 그 양반들에게로 달아나지만, 고을에서는 감히 묻지도 못한다. 조정에서는 걱정만 할뿐 금할 수가 없다.”(이익의 <<성호사설>>, 제7권)
“우리나라의 노비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라가 약한 것도 이 때문이요, 백성이 가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대 전해오는 노비라도 오히려 숫자를 한정하여 함부로 늘리지 못하게 해야 하거늘, 하물며 평민을 노비삼아 억류하고 있는 지경에 무슨 말을 하랴?”(같은 책) 노비 문제에 관한 이익의 비판의식은 이처럼 철저했다.
이익이 그토록 염려한 노비문제는 점차 풀려갔다. 이미 이익이 생존하던 18세기 전반부터 도망노비가 크게 늘어났다. 학계의 통설만큼 농업생산력이 혁신적으로 발전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농업현장에서 임금 노동이 점차 중요성을 인정받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노비노동력은 점차 구매력을 잃어갔다. 여기에 노비의 소유자인 양반들의 궁핍화도 한몫을 더해, 노비들의 도망이 한 시대를 유행하는 풍속도가 되었다.
도망노비란 존재는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성풍(成風)을 이룬 것은 역시 조선후기의 일이었다. 도망간 노비를 다시 붙잡아 오거나, 거주지가 확인된 그 자손들에게서 오랫동안 밀린 세공을 받아내는 일을 ‘추노(推奴)’라 불렀다.
추노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 일이 성사되려면, 우선 도망노비들이 살고 있는 지방 관청의 도움이 절실했다. 16세기 말 오희문(1539-1613)은 <<쇄미록(瑣尾錄)>>이란 일기책에서 충청도 직산 현감의 도움으로 자신의 도망 노비를 추노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쓰인 한문소설들을 읽어보면, 추노에 나섰다가 도망노비들의 계략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도망노비들로서는 사실상 생사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추노의 덫을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들을 쫓는 ‘추노객(곧 추노꾼)’과 도망노비들 사이에는 지방의 향리와 수령들은 물론 국가가 개입되어 있었다. 신분제 사회라서 추노객인 양반이 ‘갑’이라면 도망노비는 ‘을’의 신세였다. 추노꾼의 이야기는 지난 2010년 텔레비전 사극으로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그것은 물론 하나의 극이었을 뿐, 거기서 역사의 실상을 만나기는 불가능했다.
18-19세기 조선왕조는 추노의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을까? ‘이미 양인 행세를 하는 노망노비를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되돌리기보다 그대로 놔두는 편이 좋다. 세원(稅源)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 편이 국가에 유리하다.’ 조정대신은 이런 입장이면서도, 도망노비를 찾느라 혈안이 된 먼 친척들의 입장을 고려해 갈팡질팡하였다. 그래도 대개는 추노에 관해 미온적인 태도였다.
엄밀히 말해, 노망노비의 문제는 조정대신을 배출한 유력한 양반들이 당면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난한 양반들의 일이었다. 그 때문에 대신들은 짐짓 국가의 실리를 꾀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아나갔다. 결과적으로 양민이 된 도망노비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다행히 노비가 수적으로 크게 감소하였다. 19세기 초, 국가 및 관공서가 부리는 공노비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양반층이 소유한 사노비 역시 성호 이익의 시대에 비하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대세는 노비의 점진적 소멸이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든가.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도 19세기 중반부터 노예라고 불리던 피압박 계층이 신분해방을 맞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노비의 감소는 그때 세계 역사를 지배하는 보편적 흐름이었다. 나라마다 사정은 달랐지만 인신구속을 통한 노예 상태가 사라지고, 그들의 인권과 노동력을 교묘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풍조가 대세를 이루었다.
‘노비해방’이란 멋진 구호에 비해, 많은 사람의 삶은 초라하다 못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많은 한국사 개설서에서는 마치 해방 노비가 부자도 되고 양반도 된 일이 흔하디 흔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었다. 그들의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빈한한 소작농 또는 임금 노동자로의 평행이동이었다!
산업화 이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처한 상황 역시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1960년대부터 국가공권력에 의해 강행된 공업화와 도시화 정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조상대대로 살던 정든 고향마을에서 쫓겨났다. 하루아침에 이농민이 된 것이다. 그들은 가까스로 도시 변두리 또는 위성도시에 정착하여 세입자가 되고 말았다. 이를 악물고 노동자가 되었고, ‘조국근대화의 기수’가 되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보통 시민은 기를 쓰고 있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서 그들 자신은 구경도 못한 대학으로 자식들을 진학시켰다. 아들딸이 대학을 졸업하면 행여 삶에 큰 변화가 생길 줄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던가. 도시로 간 이농민의 자녀가 대학을 마칠 때가 되자, 세상은 또 급변하였다. 이제는 청년실업자와 비정규직이 대세를 이루는 이상한 세상이 오고 말았다. 죽을 힘 다해서 가까스로 도망노비가 되었으나, 그들의 조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굶주린 소작농 또는 날품팔이 신세였다. 이것이 100년, 200년 전의 일이었는데,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이 나라의 주인은 대다수 시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마땅한 출구전략이 없다. 취업난과 급등한 부동산 가격이 추노꾼인 셈이고, 시민은 이리저리 내몰리는 도망노비나 다를 바가 없다.
은연중에 도망노비를 보호한 조선이란 국가도 기능면에서 보면 추노꾼과 무엇이 얼마나 달랐든가. 잘해야 비정규직에 불과한 청년들에게 이런저런 복지를 약속하는 대한민국 역대 정부는 기껏해야 세원 확보에 관심을 가졌던 조선왕조와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추노 문제에 미온적이던 조선의 대신들만큼이나 대한민국의 기득권층 역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에 둔감하다면, 내 말이 거짓인가. 결국에 저들은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시민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이제라도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