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절대권력 밑에는 아첨꾼이 줄지어 선다. 고대부터 이 아첨꾼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비서 한 사람은 독재자를 가리켜, ‘단군 이래 최고의 성군’이라며 아부했다. 그는 이승만 치하에서 장관벼슬까지 하였는데, 1960년 이승만이 쫓겨난 뒤에도 아첨의 습관만은 변치 않았다.

그리하여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그 편에 붙어서 이번에도 ‘반만년 역사상 최고의 성군’ 타령을 읊조렸다. 뒤에서는 다들 그의 지조 없음을 비웃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문제의 아첨꾼은 권세와 부를 누리며 천수를 마쳤다. 그는 후대의 숱한 아첨꾼들 사이에서 진정한 모범으로 기억될 만하였다(그 사람의 이름은 윤치*이라고 합니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진(秦)나라에 조고(趙高, ?-기원전 207)라는 희대의 아첨꾼이 있었다. 그는 환관으로서 진시황(秦始皇, 재위 기원전 247-210)을 최측근에서 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시황이 순행 중에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진시황은 죽으면서 태자 부소(扶蘇, ?-기원전 210) 에게 전위(傳位)한다는 조서를 조고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나 조고는 황제의 죽음을 숨긴 채 여행을 계속했다.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하자 조고는 소금에 절인 정어리를 수레에 가득 담아 행렬을 뒤쫓게 했다.

조고는 부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부소로 말하면 분서갱유(焚書坑儒, 기원전 221) 때 선비들을 살리고자 애쓴 왕자였다. 그는 이른바 사상의 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분서(焚書)를 요구했던 승상 이사(李斯, ?-기원전 208)와는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조고는 바로 그 틈을 이용했다. 그는 이사와 공모해 부소를 죽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권에 걸림돌이었던 부소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 다음, 망국의 수순을 차례로 밟았다.

우선 그들은 공모 끝에 얼간이 호해(胡亥, 기원전 229?-207) 왕자를 2세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리고는 부소와 충성스런 몽염(蒙恬, ?-기원전 210) 장군을 자살로 몰고 갔다. 이제 조고와 이사가 서로 권세를 다툴 차례였다. 이사는 기발한 책략으로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게 만든 정치가로, 법가 사상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이사 따위는 간사한 조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침 진승(陳勝, ?-기원전 208)과 오광(吳廣, ?-기원전 208)의 반란이 일어나자, 조고는 이사를 무고해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함양의 시장터에서 그를 공개 처형하였다(기원전 208년).

기고만장한 조고는 어리석은 호해 황제를 노골적으로 기만하였다. 그 앞에 사슴을 끌고 와 말이라고 우길 정도였다. 호해는 사슴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조고의 위세에 눌려 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를 낳았다. 충직한 일부 신하들은 그때 사슴을 사슴이라 대답했고, 조고는 그들을 하나 둘씩 차례로 처단하였다.

이후 조고는 호해를 충동질해 신하들을 활로 쏴 죽이는가 하면, 목과 코를 베고 삼족을 멸하게 했다. 이런 폭정만으로도 부족해 역사상 최초로 간관(諫官)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언로를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충간하는 신하의 씨를 아예 말리기 위한 간악한 제도였다. 조고는 호해까지도 죽임으로써 진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다. 마지막에 그는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 ?-기원전 206)을 옹립하여 진왕(秦王)으로 삼았으나 곧 자영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의 3족도 함께 처벌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진나라는 망하고 한(漢)나라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1560-1623)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조고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무도 대꾸를 못하자 그 장면을 지켜본 한 선비가 대답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조고와 이이첨이 똑같다.” 그에 앞서 이이첨은 광해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광해군의 형 임해군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한 다음 사사(賜死)하였고, 광해군의 조카 진릉군도 같은 수법으로 제거하였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 또한 이이첨이었다.

선비의 놀림을 받자 화가 난 이이첨이 그를 잡아 죽이려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은 재빨리 도망쳤지만 곧 체포되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임상원(任相元), <<염헌집(恬軒集)>>)

근세에도 위험천만한 아첨꾼들의 행렬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앞에서도 잠깐 예를 들었지만 이승만은 아첨꾼들에 둘러싸여 정신 못 차리다시피하였다. 낚시질을 하러 간 이승만이 방귀를 뀌고 겸연쩍어 하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는 아첨꾼도 있었다.

독재자 박정희 때도 아첨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무려 18년 동안 절대 권력이 존재하였으니, 크게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뒤 이어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로 권력을 거머쥐자, 시인 서정주(1915-2000)는 전두환이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이뤘다며 망발했다.

2010년 11월, 김문수 경기 지사는 이명박 대통령이야말로 “반만년 역사에서 최고”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권 도전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신호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속이 훤히 내보이는 얄팍한 발언이었다. 이런 식의 아첨으로 역사의 새 방향을 열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앞으로도 아첨꾼의 행렬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을 즐기는 권력의 속성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저들의 유구한 맥을 뉘라서 끊을 수 있으랴. 시골 노인인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아첨꾼은 5월 18일만 되면 광주 망월동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경향이 있다. 이제는 누구든지 민주주의자로 행세하는 것이 유리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제 심중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티끌만큼도 없으면서, "모든 독재자에게 저항"하겠다며 큰소리 치는 전직 검사님도 있다고 한다. 그는 과연 엄혹한 시대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일까, 전혀 궁금하지도 않다.

불과 몇 해 전만 하여도 독재자를 편들며 교과서를 뜯어고치고, 망월동 추모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는 입밖에도 내지 못하게 호통을 치던 사람들, 그들도 이제 대선이 가까워 오자 호남 민심을 휘어잡겠다면서 돌연 입장을 바꾸고 있단다. 이른 아침부터 망월동에 고이 잠든 민주 호국 영령의 단잠을 깨우며, 풍성한 꽃다발 세례에 기름기 도는 헌사를 바치는 저들의 모습을 보라.

시민을 사랑하는 척, 민주주의 대열에 함께 하는 척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사탕발림으로 시민을 속이고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불쌍한 것은 억울하고 비참하게 제 목숨을 잃고 들판에 누운 영령일 것이다.

누구든지 한두 송이 꽃만 바치면 민주화 운동의 계승자가 되고, 잘 찍은 사진 몇 장만 있으면 세상을 감쪽 같이 속일 수가 있다니, 참으로 스마트한 세상이다. 이러고서도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사람일까 요괴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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