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1.
이 책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을 발견하게 되지요. 저자가 <<바람의 끈>>(이정지, 신아출판사, 2020)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는 바로 그 끈을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삶의 끈에 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제입니다.
이정지 선생님은 삶의 연결 방식을 탐구하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섬세한 눈길로 우리 땅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찾아내서 매듭을 엮는 것이 이 선생님의 특기입니다. 작가의 특징은요, 일상이 삶의 중심이듯 이야기의 중심도 집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집 근처에 있는 박물관과 여러 유적지를 누비며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시간의 끈을 찾아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어요.
2.
이정지 선생님은 지금 전주에 사시는데요. 가까이에 있는 국립전주박물관과 집 근처의 황방산 그리고 혁신도시를 한발짝씩 더듬어 나간 것이 보배롭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가슴에 품고 살고, 지구인으로서 동서양을 오갑다마는 일상의 무대는 특정한 지역이 되기 마련이니까, 어디에 살든 그곳의 유물과 유적부터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지요.
덕동유적과 신풍유적, 갈동유적, 갈산리유적, 반교리유적, 상림리유적 등을 이정지 선생님처럼 세밀하고 그윽한 눈길로 들여다 본 이가 과거에도 있었든가요? 아마 없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이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유물을 하나씩 선보입니다. 이렇게 귀할 수가 없어요! 이 책의 이야기는 전주라는 공간적 울타리 안에서 전개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이 땅 어디를 가도 실은 이와 같거나 비슷한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전주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역사 이야기인 셈이지요.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여러분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3.
저자 이정지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그분의 저술 목록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시집으로는 <<휘어짐의 일상>>과 <<흐르다가 멈춘 물방울 사이>>가 있고요. 수필집도 있네요. <<마흔아홉 – 백제녀편지>>에 또, 영어로 쓴 글인 것 같은데요. MY LIFE IN ENGLAND도 있다고 하는군요. 참으로 세계인입니다! 이밖에도 앞에서 말씀드린 <<바람의 끈>>과 <<지사랑이>>라는 그림책도 보입니다.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책을 쓰신 분이라는 점을 알고, 새삼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이정지 선생님을 좀 알기는 합니다. 선생님의 요청으로 강의를 한 적이 두어 차례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많은 글을 쓰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 불찰이기도 하고, 이 선생님이 겸손하신 분이라서 잘 모르고 지나칠 뻔하였습니다.
4.
이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서 <<마흔 아홉 - 백제녀 편지>>(이정지, 높이깊이, 2017)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역시 일상을 무대로 전개되는 글입니다. 작가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진솔한 맛이 좋습니다. 꾸밈없는 질박한 언어로 삶의 자잘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 날카로움이 빛나는군요. 책을 읽어보신 다른 분들도 아마 동의하실 것으로 짐작합니다만,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 돋보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제가 보기로 이 작가님의 글은 따뜻한 정감이 있고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씀입니다. 솔직하고도 은은한,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감정의 동요를 가져오는 글이 아닌가 합니다.
5.
끝으로, <<마흔 아홉>>의 한 대목을 글 시렁에 올려두려고 합니다. 함께 음미하며 천천히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시댁은 육지의 섬이라고 불리는 (경북) 영양의 금학동입니다. 고추로 유명한 산촌입니다. 특히 시댁이 있는 금학동은 버스의 종점입니다. 청학동보다 더 깊게 느껴집니다. 금학동에 도착하니 밖은 어둑어둑 산 그림자가 내려옵니다. 예비 시부모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동네 밖에 나와 계십니다. 택시가 불을 밝히고 들어오는 거을 보고 마중나왔답니다.
산촌의 밤은 깜깜했습니다. 영양가는 길은 하루 종일이었습니다.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분명하고 이성적인 저희 부모님과는 정 반대의 정서입니다. 다음날 인사를 드리고 전주로 오려하자 시아버님은 투박한 손으로 봉투를 쥐어주십니다. 두툼합니다. 영양을 힘들게 찾아갔지만 따스한 정을 듬뿍 먹고 돌아왔습니다.”(이정지, <<마흔 아홉>>, 높이높이, 2017, 28-29쪽)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