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동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
1.
오늘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입니다. 동학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일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생각해 보니 서울에서 청소년들과 동학에 관하여 함께 공부하던 때가 있었어요. 여러 해 전 서울 영등포의 "하자센터"에서 였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제가, 몇 차례 주섬주섬 설명을 하였지요. 그러고 나면 그때마다 한참 질의응답이 있었지요. 이제와 돌이켜 보면 참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2.
그때 우리가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를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시간 되시는 벗님들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잘 몰라서 대답을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한 대목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점점 많아집니다. 늙어간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질의응답>
질의: 현대 서울처럼 수천만 명이 모여 사는 사회는 약점은 많고 장점이 별로 없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런 말씀을 듣고, 도시와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민주화도 문제가 생기고 삶의 질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 같다는 염려를 하게 되었어요.
응답: 맞아요. 제 생각은 그래요. 가령 미국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국가는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어렵다고 봐요. 연전에 미국의 퍼거슨시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지요. 시민들의 생명과 재신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아무런 총기도 소지하지 않은 흑인 청년을 그냥 쏴서 즉사하게 만들었어요. 미국에는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요. 참고로 그 경찰은 백인이지요.
미국사회에는 아직도 인종 간의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교과서에만 적혀 있는 거지요. 시민들의 삶속에 그런 이념이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어요. 그래 가지고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될 수가 없어요. 상당수 백인들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멸시하고 의심하는 버릇이 있어요. 인간이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념이 없는 거죠.
그런데요. 질문자는 어쩌면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또 있을 것도 같아요.
‘교수님. 1000만 명이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데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서 새로 마을을 이뤄야한다는 뜻입니까?’
제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왕에 1000만 명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다시 어디론가 갈 수는 없으니까요. 같은 아파트, 같은 거리에 살고 있는 시민들끼리 연대하고 협동하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한 동네 또는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오가며 서로 인사도 하고요. 함께 길거리 청소도 하고요. 아이들을 같은 학교에 보내고 함께 돌봐주는 일이 중요한 거지요. 그런데 그처럼 되려면 ‘베드(bed) 타운’은 진짜 ‘배드(bad) 타운’이라고 생각해요. 잠만 자고 다른 지역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면 공동체로서 기능할 수가 없어요. 되도록 한 지역에서 거주하고, 일하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또 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결혼도 거기서 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2000년대 초에 독일 베를린에 잠깐 살았어요. 베를린은 독일 최대 도시여서 인구가 300만 정도였던 갓 같아요. 그 베를린에서 참 재밌는 말을 들었어요. 그곳 시민들이 저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요, ‘베를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렇지만 착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어요. ‘무슨 착각이요?’ ‘베를린은 도시가 아닙니다. 선생은 베를린시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베를린의 달렘 마을에 와 있어요.’ 이렇게 얘길 했어요. 제게는 그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베를린 시민은 존재하지 않은 거죠. 베를린이라고 하는 대도시는 수백 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어요. 국제도시 베를린이 그래요. 으리으리한 명품 쇼핑거리야 물론 우리가 아는 휘황찬란한 국제도시 베를린이지요. 그 나머지는 대부분 마을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도 텃밭 농사도 짓고 그래요.
유럽의 도시에는 어디나 다 농사를 조금씩 지을 수 있는 ‘주말 농장’이 있어요. 유럽의 도시들은 우리의 서울처럼 삭막하게 거대 도시로 탈바꿈한 적이 없는 거지요.
현대 한국의 도시처럼 무미건조한 곳이 다른 대륙에는 거의 없어요. 산업화가 우리보다 100년 이상 빨랐던 서양의 도시들이 우리의 도시보다 더욱 목가적이란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아요?
저 사람들은 마을의 연합체로서의 도시에 익숙한 것 같아요. 그들은 아직도 마을공동체에서 숨 쉬며 내일을 꿈꿔요.
우리나라 서울에서는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인 거지요. 가령 강북에 사는 사람도 아침밥 먹고 일찍 강남으로 출근하고, 퇴근시간 되면 만원 전철 속에서 시달리며 강북으로 되돌아가는 식이죠. 이는 참 잘못된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 세력은 경제성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대도시 위주로 국토를 재편성했어요.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 주변에는 잠만 자는 위성도시를 여러 개 만들었지요. 결과적으로 생활의 질이 악화되었고요. 만성적인 교통 문제, 교육 문제 등이 덩달아 생긴 것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질의: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만들 수 있으면 멋지고 신나는 일이겠어요. 그런데요. 국가를 정치공동체라고 말하지만 실은 경제공동체이기도 하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성격을 가진 공동체로 이해할 수도 있어요.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국가가 사실상 전부인 것 같아요. 이 국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민들의 의지를 느낀다면 별로 환영하지 않을 것 같아요. 도대체 인간과 사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척 복잡한 것인데요. 새로운 경제공동체가 가능하다면, 그런 정체성의 바탕은 무엇이 되어야 될까요. 오늘날에는 지연도 혈연도 이미 옛말이 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어요.
응답: 현재로서는 우리의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입니다.
우리사회에서는 누구나 국민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해요. 대통령도 ‘국민 여러분!’이라고 부르면서 말을 꺼내기 일쑤지요. 그러나 저는, ‘국민’이란 말은 하루빨리 폐기 처분하는 것이 좋겠다고 봐요. 서구 여러 나라에서도 ‘국민’이라는 표현은 없는 것 같더군요. 국민, 즉 국가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국민이라 부르는 법이 없고, ‘시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죠.
알다시피 우리가 쓰는 ‘국민’이라는 용어는 따지고 보면 매우 불쾌한 과거와 직결되어 있어요. 국민이라는 말이 실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준말이라고 봐야 해요. 일본은 천황제 국가여서 ‘황국’이라고 했죠.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들이란 뜻에서 ‘황국신민’이라고 하고요. 그것을 줄여서 ‘국민’이라고 불렀고요.
과거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어요. 황국신민을 기르는 학교란 뜻이었지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국민학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아직 멀쩡한 시민을 여전히 국민이라고 불러요. 좀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여전히 국민이란 말을 사용하는군요.
한국이란 국가가 있으니까 국민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봐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국가의 구성원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이죠.
국민이라는 말은 설사 ‘황국신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해도,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우리 같은 약소국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보았어요. 국가에 속해 있음을 강조하는 용어니까요.
국민이란 용어는 시민의 자유와 시민의 자율성과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언어적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우리는 국가에 얽매인 존재라기보다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공유하는 자유로운 시민이라고 봅니다. 시민적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서구 사회에서도 시민이란 용어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왤까요? 서양 중세사회에서 자유를 획득한 이들은 도시의 시민이었으니까요.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 이런 말도 있었잖아요. 군주의 압제에서 벗어날 권리를 그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한 것이었어요. 시민이란 말이 그만큼 특별했던 거예요. 시민이란 용어가 너무도 서구적이라서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고 항변할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편이 국민보다는 100배 낫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시민은 반드시 어느 도시에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장사를 한다는 뜻의 시민도 물론 아니지요. 자유인이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어야 시민인 것입니다.
자유인은 동학의 가치와도 잘 어울립니다.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가장 존귀한 하늘이니까요. 국가를 우리가 지금 당장 해체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언젠가 국가를 새로운 삶의 공동체로 개조해야 될 것이 아닌가요.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개조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역사적 행로를 그대로 되풀이하자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로서는 서양의 역사에서도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보편적인 가치를 그대로 흡수하고, 거기에 동학을 비롯해 우리의 전통 속에서 이어가고자 하는 가치를 융합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아마도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일 테지요. 많은 시민들이 오랫동안 토론하고 합의라는 과정을 거쳐야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언젠가는 그런 큰일을 해낼 줄로 믿어요. 역사를 오래오래 공부하면서 우리 시민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어요.
지난 수십 년 동안만 해도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그렇게 심했으나, 시민들의 힘으로 넘어섰습니다. 그 뒤 전두환이라는 악랄한 군인이 세상을 쥐고 흔들었으나, 용감한 대학생들과 ‘넥타이 부대’라 불린 시민, 회사원의 힘으로 쫓아냈어요.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고, 적폐라 불리는 고질적인 폐단이 도처에 많아요. 그래도 우리 시민들은 ‘촛불시민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역사적 경험이 있어요. 누구도 도저히 바꿀 수 없어 보이는 역사의 난제도 하나씩 해결한 것이 바로 우리 시민들의 지난 역사였어요. 우리에게는 역사를 바꿀 강력한 힘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질의: 옛날 사람들은 동학을 처음 접했을 때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마을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무엇인가가 있었으니까요. 교리를 배울 기회도 있었을 테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현재의 상황은 많이 다르거든요. 우리 청소년들이 교육 현장에서 동학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아요.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응답: 아주 훌륭한 질문이에요. 맞아요. 19세기 말에는 청소년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배울 기회가 분명히 있었어요. 포와 접이 운영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교리를 배우는 제도권 학교가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동학은 관헌의 탄압을 받고 있었지요. 나중에는 천도교 본부도 있고 지부도 있어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초기에는 ‘포접제’라는 일종의 비밀결사 안에서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죠.
포접제라는 것은 접주를 말단조직으로 하고, 그 위에 대접주가 있었지요. 접주라는 이는 마을사람인 거죠. 그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중심으로, 이웃의 여러 마을을 아울러 ‘접’으로 삼은 거죠. 접주의 책임 아래 교도들에게 교육을 한 것입니다.
동학에 육임제라고 하는 직제가 있었어요. 동학의 말단 조직은 간부들이 여섯 가지 임무에 종사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교수’라는 직책도 있었어요. 현재도 1894년에 최시형이 어느 마을에 사는 누구를 접주 또는 교수로 임명했다는 문서가 남아 있어요.
마을, 또는 이웃 마을의 평민지식인 가운데 교리를 아는 선생이 있어서 그에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의 공부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런 정신을 되살리려고 하면 비공식적인 마을학교가 있어야 되겠어요. 마을에 뜻이 있는 어른들이 모여서 배움터를 만들고, ‘얘들아, 이 책도 한번 같이 읽어보자. 이것도 한번 토론해보자. 이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식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학교는 반드시 정규적인 학교라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대학 입시공부만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뜻있는 어른과 청소년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우리의 ‘오래된 미래’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있어야겠어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 동학에 국한될 이유는 물론 전혀 없는 것이고요. 우리에게 동학이란 지나간 시절의 동학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출처: 백승종,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들녘, 2019)

덧붙이는 말: 저는 동학의 등장이 갖는 의미를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관계의 질적 전환"이라고요. 기성의 제도와 관습에서 자유로와진 너와 네가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데 동학의 참 뜻이 있다고 봅니다.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 사람과 우주 ... 이런 모든 관계를 지배와 소유로서 보는 것이 아니죠. 사랑의 눈으로 이 모든 관계를 혁신하려는 데에 동학의 참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상을 대표하는 이가 해월 최시형입니다. 틈만 나면 제가 늘 강조하는 "평민지식인"의 전형이었습니다. 해월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던 전봉준 선생도 세상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전환하기에 노력한 분이었지요. 우리는 이 분을 장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마는, 저는 "선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실제로 이분의 직업이 선생님이기도 하였고, 목숨을 걸고 실천한 바도 선생의 역할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전봉준 선생은 농민에게 땅을 되돌려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모두를 자립적이고도 상호의존적인 존재로 되살리고자 하였어요. 그 점은 전봉준 선생이 적에게 처음 붙잡혔을 때 하신 말씀 가운데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도 "관계의 질적 전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제도와 관습으로, 우리는 왜곡된 관계망 속에서 질곡을 겪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 관계를 풀어헤치고, 정의롭고 자유로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