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글을 시작하며
중국의 영토였던 홍콩은 1842년 영국에게 할양되면서부터 다양한 민족이 운집하는 국제중계무역항구가 되어 동서 문화가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 각국의 다양한 전통과 문화가 서로 혼합되고 교류되면서 홍콩은 독특한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당시, 150여 년 전 농어촌사회였으며 아편․ 소금․ 무기 등의 밀수 중심지였던 홍콩이 아니라 세계무역의 중심지이며, 금융의 중심지인 동시에 법에 의하여 통치되는 작은 민주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이렇게 홍콩이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치적․ 사회적 안정이었다.
그러나 2019년 6월부터 홍콩에선 시위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월 9일 범죄인 인도 법안, 일명 ‘송환법’ 도입 반대 집회에서 시작된 반중(反中) 시위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격렬해지고 있다. 덩달아 경찰의 진압도 과격해지고 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한 여성이 실명을 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최루탄은 물론 실탄까지 발사됐다.
홍콩 시위대는 중국을 향해 ‘죽어도 같이 죽자(If we burn, you burn first, 람차우攬炒)’고 외친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홍콩 시민의 칼끝이 어쩌다 중국을 향하게 된 걸까. 홍콩의 분노를 이해하려면, 1997년 홍콩 반환 전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의 현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10~20대 청년층이 이번 시위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시위를 기획하고, SNS를 통해 정보를 공유한다. 특정 단체가 집회를 지도하는 게 아니라, 청년 개개인이 주체가 되어 동참한다.
또한 홍콩 시위의 불길은 중국 바깥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이제 동아시아 판을 흔들 변수로 부상했다. 중국 지도부가 강경 진압에 나설 경우 미․ 중 간에 한판 싸움은 불가피하다. 트럼프는 최근 홍콩 시위에 대해 ‘인도적인 해법을 보고 싶다’거나 ‘(홍콩에서) 나쁜 일이 생긴다면 이는 협상에도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 중국은 일찌감치 미국의 개입을 ‘내정 간섭’이라고 규정해왔다. 홍콩 시위에서 시작한 갈등과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본문에서는 홍콩의 역사와 일국양제에 대해 소개하고, 홍콩인들이 중국정부에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며, 홍콩 사태로 反中 감정이 고조된 대만과 홍콩사태의 해결방법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홍콩의 역사와 일국양제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 체결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淸)나라에서 영국으로 할양됐던 홍콩은 1997년 중국 품으로 155년 만에 돌아왔다. 홍콩인들의 주권은 ‘반환’된 것이기도 하지만, 중국으로 ‘회귀(回歸)’한 것이기도 하다.
영국 지배하의 홍콩이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항으로 발돋움하는 동안, 중국은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거쳐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했다. 100년 이상 서로 다른 길을 달려온 두 사회는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로 불린 덩샤오핑(鄧小平)이 1980년대 영국과 협상 당시 제시한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국가 두 체제, one country two system)’로 타협점을 찾았다. 이는 지금까지 중국의 홍콩 정책을 표현하는 핵심 슬로건이 되고 있다.
1982년 9월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당시 최고실권자 덩샤오핑과 마주 앉은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영국이 1840년 아편전쟁의 승리로 청조(淸朝)로부터 1842년부터 150 여 년 간 조차한 홍콩을 계속해서 관리해 주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때 덩샤오핑이 “홍콩의 안정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대처에게 던졌다. 덩샤오핑은 “홍콩의 안정은 홍콩과 중국의 경계선 안쪽에서 영국군복을 입고 방어하고 있는 구르카족 병사들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뒤 “홍콩의 안정은 홍콩 바깥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인민해방군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몇 백만의 사람들이 홍콩으로 유입되면 홍콩의 안정이 유지되겠느냐”고 경고했다. 회담을 마치고 인민대회당 밖으로 나온 대처 총리가 인민대회당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던 이야기는 사진과 기록으로 남아 있다. 홍콩의 주권을 1997년 7월 1일 중국에 반환하기로 약속한 대처에게 덩샤오핑이 제시한 홍콩의 통치 시스템이 ‘항인치항(港人治港)’, 곧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였으며, 50년간 중국은 홍콩의 국방과 외교권만 장악하고, 홍콩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정치· 사회 체제는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일국양제’였다.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통치 시스템이 공존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 덩샤오핑의 뜻이었고, 그런 덩샤오핑의 약속은 1997년 7월 1일부터 홍콩에서 발효된 ‘홍콩 기본법(Basic Law)’ 제5조에 “홍콩특별행정구는 사회주의 제도와 정책을 실행하지 않고, 원래의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이는 50년간 불변이다”라는 조항으로 남았다.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를 인정하는 ‘항인치항(港人治港)’을 유지하면서 홍콩의 국방과 외교권만 장악한 채 홍콩의 기존 자본주의 체제는 50년간 지속할 수 있도록 한 ‘일국양제’가 적용됐다. 2019년은 그때로부터 22년이 흐른 때이다. 앞으로 28년이 더 흐른 2047년이 되면 홍콩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2015년 12월 홍콩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에서 개봉된 독립영화 ‘10년(Ten Years: 중국의 통제가 한층 강화된 홍콩의 암울한 미래를 그린 옴니버스 영화 ‘10년’이 홍콩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을 보면 왜 홍콩 시위에 20, 30대 젊은이들이 주로 가담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독립영화 ‘10년’은 영화 제작 당시로부터 10년 후인 2025년의 홍콩을 그리고 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영화를 옴니버스로 묶는 형식으로 제작됐는데, 각각의 제목은 ‘엑스트라’, ‘겨울 매미’, ‘방언’, ‘분신자살자’, ‘현지 계란’ 등이다.
또한 2019년 6월부터 7개월 넘게 계속돼온 홍콩의 폭력적 가두시위에 홍콩의 20, 30대 젊은이들이 주로 가담하는 이유는, 홍콩의 주권 반환 50년이 흐른 2047년이 불과 27년 뒤, 이들 젊은이들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면 다가올 홍콩의 사회주의 세상에 대한 불안감을 의식의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 젊은이들의 폭력시위는 무엇보다도 덩샤오핑이 설계한 일국양제의 기반을 흔들어 놓고 있으며, 2047년 이후 자본주의 홍콩이 사회주의 홍콩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에서 출발한 불안감이 홍콩 젊은이들의 폭력시위를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시진핑(習近平)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2047년 이후 홍콩의 미래에 대한 그림을 새로 그려주지 않는 한 이번의 시위가 진압되더라도 앞으로 또 다른 시위가 발생할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중국 대학가의 지식인들은 “만약 덩샤오핑이 살아있었다면 2047년 이후의 홍콩 미래에 비전을 그려주는 언급을 어떤 형태로든 했을텐데···”라며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앞으로도 일국양제를 적용해야 할 대만과의 통일 전망도 어두운 색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홍콩 민주화시위와 중국에 분노하는 진짜 이유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중국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발생한 민주화시위 중에 비교적 규모가 큰 시위는 우산혁명이다. 2014년 9월 홍콩에서 일어난 우산혁명(Umbrella Revolution)은 시위진압 당시 당국의 최루액을 우산으로 막아낸 시위대의 행동에서 우산혁명이라는 말이 연유했다. 시위의 발단은 홍콩 자치정부의 수반이라고 할 수 있는 행정장관 선출방식 때문이었다. 행정장관은 ‘홍콩 기본법’에 따라 800명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의 추천과 투표를 통해 선출돼 왔지만, 이는 간선제 방식인데다 그 동안의 행정장관들이 모두 친중 성격의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홍콩 시민들의 불만을 사왔다.
우산혁명은 당국의 권위주의적 대응과 시위대의 이탈로 시위는 79일 만에 끝났지만,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열망을 확인했으며,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훼손된 홍콩의 민주주의가 해외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산혁명을 통해 그동안 중국이 천명해온 ‘일국양제’의 허상을 전 세계에 폭로한 것이다.
2019년 4월 홍콩 정부는 '범죄인 인도 법안'인 '송환법(送還法)'을 추진했다. 이 법안은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에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2019년 대만에서 범죄를 저지른 한 홍콩 남성의 대만 송환 건으로 추진된 '홍콩송환법'이 오히려 중국에 반중국 인사를 송환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본 홍콩시민들에 의해 거센 반발을 낳으면서 시위가 촉발되었다. 6월 9일에는 홍콩시민 100여 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6월 16일에는 주최 측 추산 2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에 따라 홍콩 정부는 법안의 추진을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2017년 취임한 이래 친중 성향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와 송환법의 완전 철회를 요구하면서 반중 시위로까지 발전했다. 8월 5일엔 50만 명이 총파업에 참여, 도시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9일부터는 시위대가 홍콩첵랍콕국제공항에서 송환법의 부당성을 알리는 시위를 시작했다. 공항에서의 시위는 점차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12~13일에는 공항 기능이 마비되었다. 시위대는 ⓛ송환법 완전 철폐 ②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③체포자 시위 참여자의 조건 없는 석방 ④경찰의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 ⑤행정장관 직선제 보통선거 실시 등 5대 요구를 제시했다.
9월 4일 홍콩 행정 장관인 캐리 람이 송환법 철회를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나머지 4개 조건의 이행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지속했고, 홍콩 정부는 10월 4일 긴급법 발동을 결정, 5일부터는 시위에서 복면착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물리적 충돌에 의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11월 들어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11월 들어 시위는 홍콩과 중국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국면으로 발전했다. 4일에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만나 캐리 람 장관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었는데, 이후 경찰의 대응은 더욱 강경해졌다. 8일에는 시위 중에 추락한 대학생 1명이 숨졌고, 11일에는 경찰이 쏜 실탄에 시위대 한 명이 복부에 중상을 입는 장면이 널리 보도되면서 시위대와 진압 경찰 간의 물리적 충돌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모든 학교에 14일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임시 휴교령은 계속 연장되었으며, 시위대는 홍콩 이공대를 거점으로 화염병 등 자구 수단을 마련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18일 홍콩 경찰은 홍콩 이공대에 진입해 음향대포와 물대포 등을 동원, 진압 작전을 펼쳤다. 시위대 중 일부가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려다가 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한편 홍콩고등법원은 18일 시위대의 복면 착용을 금지한 '복면금지법'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경찰의 강력한 진압은 계속되었으며, 추위와 허기에 지친 시위대가 거의 자진 투항하여 실질적인 물리적 시위는 거의 진압되었다.
홍콩 시위가 경찰의 강력한 물리적 대응에 의해 거의 진압된 가운데 11월 24일 홍콩 민주화 요구에 대한 민심이 담긴 홍콩 구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선거는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으며, 294만 명이 참여하여 71.2%이라는 역대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선거 결과 전체 452석 가운데 범민주 진영이 86.7%인 39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면서, 홍콩 경찰의 강압적인 진압에 대한 반발 및 민주화에 대한 홍콩 시민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미국 하원에서는 홍콩 시위 권리를 지지하고, 중국 정부의 홍콩 간섭을 주기적으로 평가하며, 홍콩 경찰에 미국제 무기 수출을 금지하는 3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11월 19일 미국 상원에서는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홍콩의 자치 수준을 매년 평가하여 그동안 유지해 온 관세, 무역, 비자 등에 대해 중국과 달리 대우해 온 홍콩에 대한 외교적 관계를 재심사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법안이 발효될 경우 아시아 금융 시장에서 홍콩이 그동안 유지해왔던 위상이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 법안에는 또한 홍콩 민주화를 억압한 책임자에게 미국 비자 발급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법안에 대해 중국 정부는 내정 간섭이라면서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27일 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미국과 중국 정부와의 갈등이 예견되었다.
또한 홍콩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8개월 째 이어지는 가운데 새해 첫날부터 홍콩에서 대규모 도심 시위가 벌어졌다. 2020년 1월 1일 오후 빅토리아 공원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홍콩 정부에 시위대의 5대 요구 수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와 같이 2019년 6월에 시작된 홍콩 대규모 시위가 해를 넘기고 있다. 홍콩에서 일어나는 시위를 ‘민주화운동’ 혹은 ‘반중(反中)’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배경은 훨씬 복잡하다. 홍콩인들이 중국에 극도로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보다 홍콩 젊은 세대의 경제적 기회 박탈이 핵심이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번 시위로 체포된 시민 중 30%가 18세 이하라고 한다. 홍콩의 10대, 20대가 시위를 주도하는 이유가 뭘까? 가장 큰 이유는 홍콩의 젊은 세대들이 일자리 부족과 살인적인 집값에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일자리 수만 보면 괜찮아 보일지 모른다. 홍콩의 실업률은 3% 미만으로 완전고용에 가깝다. 하지만 문제는 고소득 일자리가 홍콩의 젊은이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홍콩인들은 홍콩대 등 명문대학을 나와도 보통 우리 돈으로 2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홍콩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만 달러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동 소득이 이상하리만큼 낮지 않은가. 이는 고소득 일자리들이 외지 사람들, 특히 중국 본토 출신에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집값은 상상을 초월한다. 도심 인근 아파트의 경우 평당 2억 원이 넘는다. 25평 아파트면 매매가가 50억 원이 넘는다. 월 200만~300만 원을 받는 젊은 홍콩인에게 자기 집 마련은 이룰 수 없는 꿈이며, 집 사는 것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들은 반송환법 시위를 통해 누적된 불만을 한꺼번에 분출하고 있다.
홍콩의 젊은 세대들은 이와 같은 불합리한 상황이 정부의 무책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우선 중국 본토인들이 홍콩으로 이민 오는 행렬을 홍콩 정부가 적절히 막지 못했다고 본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 이후 매년 5만 명씩 중국 본토인들이 홍콩시민증을 획득했다. 도합 100만 명이 넘는다. 현재 홍콩 인구가 700만 명에 불과하니 홍콩이야말로 영국이나 유럽이 겪고 있는 것 이상으로 이민자와의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에서 온 이민자 중에는 최고급 인재들도 많다. 예를 들어 홍콩 명문대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살던 시에서 일 이등을 다투던 학생들이다. 이들은 졸업 이후 홍콩에 남아서 국제도시 홍콩이 제공하는 고소득 일자리를 차지한다.
둘째 홍콩의 젊은이들은 홍콩 부동산이 지난 15년간 3배 이상 오른 데는 부동산 재벌과 기득권층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부동산 공급을 억제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홍콩의 변두리 지역(신계)을 다녀보면 비어있는 땅(농장)이 상당히 있다. 언론 분석에 따르면, 홍콩의 부동산 기업들이 홍콩 변두리에 보유한 놀고 있는 토지를 개발하기만 해도 집 100만 채를 공급할 수 있다고 한다. 홍콩 인구가 700만 명이니 이 아이디어가 실현되면 아파트 가격은 큰 폭으로 하락할 것이고 홍콩의 젊은 세대는 집을 구입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도통 개발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기성세대나 부동산 기업들이 당장 개발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성도시 개발 붐을 경험했던 한국인 관점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도심 인근에 놀고 있는 땅을 개발하지 않고 놀리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정부가 시민 전체 특히 젊은 세대를 배려한다면 변두리 땅을 개발해서 아파트, 특히 공공아파트를 늘렸어야 했다. 하지만 홍콩 정부는 어떤 이유에서든, 지난 15년간 집을 충분히 공급하는 데 실패해왔다. 그 사이 홍콩 집값은 3배 이상 올랐다. 홍콩의 젊은 세대는 홍콩 정부가 부동산을 소유한 기성세대 및 부동산 기업들의 이해관계의 편에 선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던진다.
또한 150년 이상 다른 사회로 유지되었던 중국과 홍콩은 정치· 경제 등 이질감도 매우 크다. 두 사회의 정치적 이질감은 주민 사이의 정서적인 반감으로도 번졌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홍콩 영주권 혜택을 누리기 위해 원정출산이 유행처럼 번지자 이를 규제해달라는 시위도 빈발했다. 본토발 원정출산 인파에 홍콩의 분만실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지자 2011년에는 외지인 출산을 매년 3만 4000명으로 제한하는 조치도 시행됐다.
중국인 거부들의 부동산 싹쓸이에 대해서도 홍콩인들의 불만이 높다. 직접적으로 부동산 가격 폭등을 유발시켜 실제 주거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졌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은 충분히 참았다”는 문구가 담긴 신문광고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정치적 체제 차이뿐 아니라 문화적 이질감, 이민 문제, 세대 간 갈등, 부동산 정책, 경제적 위협감 등이 겹쳐진 홍콩인들의 중국 본토에 대한 뿌리 깊은 반목과 분노가 시위의 과격화와 장기화의 근본적 배경이라 볼 수 있다.
홍콩 사태로 反中 감정 고조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대만의 총통과 입법원 선거(대선·총선)가 2020년 1월11일에 치러졌다. 이번 선거는 대만(臺灣) 독립 성향의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民進黨) 후보로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이, 제1야당이자 친중 성향의 중국국민당(국민당國民黨) 후보 한궈위(韓國瑜) 가오슝 시장의 대결로 좁혀졌다. 선거 결과에 따라 중국과 대만 간 양안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선거 직전의 여론조사 추세를 보면 현 총통인 민주진보당 소속 차이잉원의 재선이 유력했다. 한때 ‘경제 무능’이라는 비판 속에 하락했던 차이잉원총통의 지지율이 홍콩 사태로 악화된 반중(反中) 감정을 발판으로 급상승했다.
차이 총통과 민진당 정권은‘독립 대만’을 내세운다는 점에서‘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 본토와 마찰을 빚어 왔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차이 총통 지지율이 이렇게 높았던 것은 아니다. 차이 총통과 민진당은 2016년 대선에서 ‘독립 주권 국가로서의 대만’을 내세워 국민당의 8년 집권을 끝내고 정권을 탈환했다. 국민당의 지나친 중국 의존 성향을 공략한 것이다. 하지만 반중, 탈(脫)원전 등 이념에 치우쳐 경제에 실패했다는 평가 속에 민진당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912석 중 26.1%인 238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경제 살리기를 내세운 국민당은 394석(43.2%)을 확보하며 약진했다. 작년 7월 초 여론조사에서도 한 시장이 38.4%로 25.5%에 그친 차이 총통을 크게 앞섰다. 대만의 대선은 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입법원 총선도 함께 치른다. 민진당은 자칫 대권은 물론 입법원까지 내줄 판이었다.
바닥을 기던 차이 총통 지지율이 반등한 결정적 이유로 2019년 6월부터 시작된 홍콩 사태가 꼽힌다. 행정장관 직선제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격화되고, 친중(親中) 홍콩 정부가 이를 강압적으로 억누르는 과정에서 대만 시민들의 반중 감정이 깊어졌다는 분석이다.
실제 2016년 취임 직후부터 중국과 거리를 두고 대만 독립 행보를 보여 온 차이 총통은 홍콩 시위를 선거에 적극 활용했다. 지난해 공개한 선거광고 ‘두 개의 세계’는 분할화면으로 평화롭고 안정적인 대만인들의 생활과 시위에 나선 홍콩인들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홍콩의 정치적 위기는 중국이 주장하는 일국양제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며, “대만을 제2의 홍콩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차이총통은 중국이 주장하는 ‘일국양제 대만방안’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대만 입법원은 지난해 말 국민당이 불참한 가운데 중국을 겨냥한 ‘반침투법’을 통과시켰다. 반침투법은 ‘외부 적대 세력’의 자금 지원이나 지시, 기부금 등을 받은 자의 선거 개입, 집회, 로비 등을 금지한다. 중국 정부는 ‘반중 정서를 부추기는 법’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이러한 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 악화는 미·중 갈등 고조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도 많다. 중국은 무력 동원 가능성까지 시사할 정도로 대만의 독립 시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반면 미국으로서는 대만이 한국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최전선이다. 대만 독립을 유지하는 게 미국의 전략적 방향이다.
2020년 1월 11일 총통선거에서 대만 독립 성향의 차이잉원 총통이 기록적인 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4년 전 타이완 첫 여성 총통이란 기록을 세운 차이잉원은 이번엔 총통 직선제 시행 이래 최다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일국양제를 수용하라는 중국의 압박이 세지고 8개월째 이어지는 홍콩 사태에 반중 정서가 고조된 속에서 선거가 치러지면서 투표율도 지난 총통 선거 때보다 8% 포인트 올랐다. 특히 젊은 유권자들이 민주주의와 '주권 수호'를 강조한 차이잉원에 열광했다.
이번 대만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차이잉원 총통은 중국의 압력에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중국은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만 독립과 분열 시도는 어떠한 형식일지라도 반대한다며 경계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대만이 민주주의의 힘을 입증했다고 평가했다. 차이잉원이 얻은 역대 최대 득표수는 그만큼 강한 대만인들의 반중 감정을 나타낸다. 대만과 중국의 긴장이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글을 마치며
2019년 6월 홍콩 민주화시위의 발단은 지난 4월 홍콩정부가 추진한 일명 ‘송환법’으로 불리는 ‘범죄인 인도 법안’이다. 홍콩인들은 이 법안이 중국정부에 반대하는 인권운동가나 반체제 인사들을 중국에 강제 송환하는 악법으로 작용할 것으로 본다. 이에 시위대는 송환법의 완전 철폐는 물론 시위대 폭도 규정의 철회, 조건 없는 구속자 석방, 폭력 경찰에 대한 독립적 조사, 직접·보통선거에 의한 행정장관 선출 등을 요구하며 캐리람 행정장관의 송환법 철회 이후에도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이는 1997년 7월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래 홍콩인들의 중국정부에 대한 근본적 불신과 불만이 누적된 결과일 것이다.
1990년 중국이 공표한 홍콩특별행정구에 관한 기본법에는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제도를 허용하는 일국양제의 헌법규정에 의거하여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홍콩에 고도의 자치권을 50년간 부여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시위 주도층은 중국정부가 자본과 인구를 홍콩으로 유입시켜 사회경제적으로 홍콩을 중국화하고, 반민주적 신제국주의 정책으로 홍콩을 식민지화한다고 비난한다.
일국양제는 단지 홍콩을 공산 중국화하기 위한 과도기적 전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그동안 서구적 민주주의와 개인주의 및 합리주의 정신으로 함양된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중국의 국가주의와 집체주의 및 민족주의적 이념의 틀에 가두는 것도 거부한다. ‘중국’이라는 표현을 삭제한 채 ‘홍콩’의 민주화와 독립을 시대적 혁명과업으로 명시한 시위대의 구호는 물론, 2019년 11월에 실시된 구의원 선거에서 범 민주진영이 전체의 86.7%의 의석을 차지한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영국 식민지 150년은 홍콩인들의 삶을 많이도 바꿔 놓았다. 홍콩인들은 중국 광동성(廣東省) 출신이 95%, 나머지는 복건성(福建省) 출신이다.
그런데 2019년 7월 홍콩명보가 전한 보도를 보면 홍콩 젊은 층 중에서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밝힌 사람은 2.7%에 불과했다. 75%가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고 답했다. 홍콩 대학이 조사한 결과에도 본인의 조국을 '중국'으로 인식하는 홍콩인들은 매년 줄어들고 있고, 특히 젊은 층은 아예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신뢰도 평가에서도 홍콩인들은 10점 만점에 2.96점을 줬다. 낙제점이나 다름없는데, 응답자의 40.3%는 중국 중앙 정부에 대한 신뢰가 '0점'이라고 답했다. 이번 시위를 이끌고 있는 조수아 웡(Joshua Wong.黃之鋒)은 "홍콩 학생들의 열망은 한국에서 수십 년 전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한국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라면서 "최종적인 목표는 자유선거로, 홍콩 사람들이 주인인 홍콩의 자치 정부를 꾸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콩은 과거에도 현재도 항상 많은 외국인과 외국 회사가 와서 일하며 사는 곳이다. 지금도 30만여 명의 캐나다인과 9만여 명의 미국인이 홍콩에 살고 있으며, 미국 기업의 홍콩 지부와 홍콩 사무실은 700개가 넘고 홍콩에서 사업을 하는 미국 회사도 1,000개가 넘는다. 이번 송환법으로 야기된 홍콩민주화운동은 ‘중국 국적’ 홍콩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홍콩에 살고 있는 여러 나라 사람들의 문제이자 전 세계의 문제임을 알리고, 홍콩의 위험이 홍콩만의 위험이 아님을 알리려는 시위대의 전략은 분명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또한 홍콩시위 발생의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일국양제’와 ‘홍콩 자치 보장’에 대한 해결책 없이 강경 진압만 반복되는 것은 문제를 뒤로 미루는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홍콩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은 중국 중앙 정부와 홍콩 행정 당국, 홍콩 시민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길 밖에 없다. 그 결과로 홍콩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홍콩 사회가 하루 속히 안정을 되찾고,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상태에 있는 홍콩의 자유와 번영은 지속되어야 한다. <사람과 언론> 제8호(2020 봄).
/구성희(박사)
<참고 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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