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길 위에서'

잠시 밖에 나갔더니 쏟아지는 햇살,

봄은 이미 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오고 그 봄이 온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려도 따스한 햇살이 가슴 안으로 파고드네.

이 봄 시절이 걷기에 가장 알맞은 시절, 하루만 집에 있어도 몸이 근질근질한 것을 보면, 이것도 큰병일세 그려.

그런데 마음 놓고 나갈 갈이 없으니, 아침 해는 내 동쪽에 있더니 저녁 해는 내 서쪽에 있네.

내가 가면 해가 가더니 해는 돌아갔는데, 나만 못 돌아갔네.

형세가 여인숙을 찾아들어야만 하게 되었는데, 먼 곳에 있는지 가까운 데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네.

내 평생 너무 멋대로 놀다 보니 

똑똑한 듯하면서도 바보만 같네.

어찌하여 오늘 길을 가는데 이불과 베개가 따르지 않는가? 

다행히 약간 포근한 봄날 만났으니 머리 끌어 박고 옷 입은 채 자리라. 

설사 오늘 저녁이 춥다 하더라도 내가 취하면 알지 못하리라. 

양만리(楊萬里)의 <저녁에 길 가던 도중(暮宿中逸)이라는 시 한 편을 읽다가 보니 문득 봄꽃들이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아른 거려 꽃을 내 마음 속으로 청하네. 

“눈물어린 눈으로 꽃에게 물어봐도 꽃은 말없고, 어지러운 꽃잎만 그네 저편으로 날아 떨어진다.“

구양수(歐陽脩)의 <접연화사(蝶戀花詞)>의 1절이 가슴을 툭툭 두드리면서 지나가네.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간다는데.

/사진·글=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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