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다. 안중근 부자의 이야기다.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은 명산이다. 그 한 자락을 타고 내려오면 이름도 맑은 청계동(淸溪洞)이 있다. 순흥안씨의 터전이었다. 19세기 말, 해주 일대를 쩌렁한 음성으로 호령한 선비가 그곳에 살았다. 부호 안태훈(安泰勳)이었다. 그가 진사라는 말도 있지만 내가 검토한 바로는 『생원진사방목(합격자명부)』에는 그 같은 이름이 없다. 아마도 진사라는 칭호는 그가 명망 있는 양반이었다는 뜻인 것 같다.

안태훈은 유달리 의협심이 강했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한 번 자신이 옳다고 믿은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이 이루고야 마는 고집쟁이였다. 그런 그가 마침내 천주교를 믿게 됐다. 프랑스 신부 니콜라 빌렘(?-1938)과 친교를 맺은 안태훈은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고, 그 뒤로 대대적인 개종 운동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청계동은 물론 이웃 마을 사람들도 모두 교회를 다니게 됐다. 안태훈은 거액을 기부해 교회를 세웠다.

1903년(광무 7) 6월 29일자(양력 8월 21일) 『승정원일기』는 안태훈의 포교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록을 전한다.

“안태훈은 청계동 와주(窩主)라는 말을 듣고 있는 자로, 황해도의 두목이라는 지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으나, 끝내 관대하게 용서해 주기는 어렵겠습니다.”

당시 의정부 참정 김규홍(1845-?)이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그 무렵 해서사핵사(海西査覈使, 해서는 황해도) 이응익은 조정에 보고하기를, 안태훈 등이 이끄는 황해도의 천주교도들은 일종의 독립된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했다.

“관청에서 하는 것처럼 송사(訟事)를 처결하기도 했고, 형구(刑具)를 만들어놓고 평민들을 못살게 굴며, 사사로이 사람들을 잡아들여 남의 재산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땅 주인을 위협하고, 관청에서 보낸 사람들에게까지 대들거나 심지어 쫓아내기는 등 횡포가 극에 달했습니다.”(『승정원일기』)

안씨 일가는 황해도의 천주교도를 대표하는 신앙의 명가였다. 1911년, 서울을 찾은 독일 분도회의 수도원장 노베르트 베버(1870-1956) 신부는 서둘러 청계동을 방문했다. 그는 안태훈의 사내다움에 연신 감탄했다.

그에 앞서 1909년 10월26일, 안태훈의 큰아들 안중근(세례명 토마스)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쏘아 죽였다. 조선 민족을 대표해 원수를 징벌한 것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다섯 달 뒤, 안 의사는 일본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최후까지도 태연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베버 신부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1916년 독일에서 간행된 베버 신부의 여행기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에 나오는 말이다. 상대가 제아무리 악인이라 해도 살인만은 절대 안 된다.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가르침이다. 베버 신부가 이것을 모를 리 있겠는가. 안 의사인들 몰랐겠는가. 옥중에서 안중근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 있었다.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이 책자에서 안 의사는 동양평화가 깨지게 된 이유를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고 만주와 청국에 야욕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명확히 지적했다.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주고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만 한국·청국·일본의 동양3국이 굳게 단결하여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베버 신부 역시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애국심과 용기 있는 행동을 기렸다. 그 아버지의 용기와 의협심이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며, 독일 신부는 연신 감탄했다. 그의 책자를 통해 한국인의 의기는 유럽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출처: 백승종, <역설. 백승종의 역사에세이>(산처럼, 2013)

사족: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께서 서거한 날이었습니다. 마침 제 글을 읽고 어느 분이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간단히 대답하였고요. 그분의 질문과 제 답변을 아래에 적어둡니다.

문 : 요새 제가 안중근에 관련된 글을 읽었는데요, 거기에 어떤 말이 나오느냐 하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잖아요. 그때 우리나라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 안중근 의사를 십계명의 하나로 살인범이라고 규정하고,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친일적이라고 자기네들이 스스로를 말했다고 하고요.

또 일본 신문 같은 데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지 않았다면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문명을 발달시키는 데 앞장서서 좋은 일을 했을 텐데 그를 사살한 것은 안중근의 잘못이다. 결국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때문에 오히려 한일병합이 되었다, 하는 것이 일본 신문의 논조였다고 나와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안중근 편보다는 일본 편을 들었다든가 하던데요.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한번 여쭤봅니다.

답 :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제가 잘 알 턱이 없지만, 심지어는 이런 얘기도 있죠.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말하자면 사살했죠. 사살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식사(수라)를 들다 말고 고종이 젓가락을 떨어뜨렸다고 하는 말이 있어요. 왕이 충격을 받아서. ‘이게 일이 잘못되겠구나’라고.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람은 정한론의 맥락에서 봤을 때는 온건주의자거든요. 빨리 조선을 어떻게 해서든지 집어삼키자는 주의자가 아니에요, 이토 히로부미는. 천천히 봐가면서 조선을 집어삼키자는 주의라는 말이죠. 더 완벽하게요. 그렇게 놓고 보면 사실 이토 히로부미가 좀 더 오래 살아 있었으면 병합이 조금 더 늦춰졌을 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늙을 만큼 늙어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설사 한국병합을 직접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한국 민족을 위해서 반대한 것이 아니고 외교적으로 좀 더 무리 없이, 매끄럽게 한국을 통일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거잖아요. 이토 히로부미가 몇 년 더 살았다고 해서 한국에게 어떤 기회가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일본 사람들은 참으로 교묘하게도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마저 한국을 침탈하는 데 이용한 거죠. 자기들의 명분으로 삼은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죽을 때까지도 애국을 위해서 그야말로 멸사봉공한 꼴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안중근이 그때 그리한 것이 망국의 일이다, 라고 말할 수가 없고요.

안 의사는 당연히 한국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고 그것은 그야말로 길이 한국 민족이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든지, 사람 죽이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런 의기를 보인 것을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안중근 의사를 비난하거나 그를 어떤 의미로든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은 애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을 죽인 것은 남의 눈으로 보면 테러리스트, 암살자입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테러도 할 수가 있는 거죠. 대의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안 의사도 역시 그런 뜻에서 대의를 실천하신 것으로 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안 의사는 옥중에서까지 동양평화론이라고 하는 장문의 글을 집필했습니다. 안 의사는 사실은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동양 사람들의 평화를 누구보다도 바랐던 안중근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형편에서는 아무리 하여도 아시아의 평화가 영원히 올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때문에 총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편을 선택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봐서는 절대 안 되지요.

안 의사가 죽인 것은 이토 히로부미 한 개인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제국주의였어요. 범죄자를 향해서 그가 쏜 총알이었지요.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라는 한 늙은 일본의 정객을 향해서 쏜 총알이 아니라고 해석해요.

개인적 원한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엄숙하고 공적인 형 집행이었다고 봅니다. 불행하게도 거기에 개인이 희생되었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로든 소극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아주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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