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환관의 역사는 깊다 

고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환관이란 존재가 각 나라의 왕실에서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다. 기록으로 보면, 이미 기원전 21세기 수메르에도 환관이 존재했다. 멀쩡한 남성을 거세해 왕궁에 두고 여러 가지 잡무를 시켰다고 했다. 환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셈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환관은 “통치자의 귀” 노릇을 했다. 그들은 왕의 침실을 깨끗이 청소했고, 왕의 이발과 목욕을 보살폈다. 대체로 궁중의 하찮은 일을 도맡았다. 그들의 임무는 비록 하찮은 것이으나, 환관은 권력자의 최측근이었다. 때문에 왕의 신임이 두터워, 환관의 권세가 비대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환관의 출신은 미천하였다. 이미 어린 나이에 거세된 경우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친자녀를 거느리지 못하게 되어, 사가(私家)의 미래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환관이란 제도를 오랫동안 운영하였다.

환관은 일종의 소모품이었다.  왕의 마음에 들면 가까이에 두고 베라별 일을 시켰다. 그러다가도 왕의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한순간에 가차없이 버렸다. 환관의 목숨은 왕의 뜻에 달려있었다.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성스럽고 유능한 환관들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이름난 재상과 학자도 적지 않았다. 기원전 4세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에는 바고아스라는 환관이 있었다. 그 이름 자체가 환관을 의미했다고 하는데,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신임을 얻어 수상을 역임했다. 나중에는 왕과 사이가 나빠져 왕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신왕 다리우스 3세가 바고아스를 처단하였다.

환관의 정치 개입은 로마제국 후기에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때도 환관들이 왕궁의 사무뿐만 아니라 국가의 행정 전반을 장악하다시피 하였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환관 출신인 나르세스 장군이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외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중국에는 이름난 환관들이 더욱 많았다. 1세기에 중국에서 사상 최초로 종이가 발명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종이를 발명한 이는 한나라의 환관 채륜이었다. 그는 궁중의 공방책임자인 상방령이었다. 채륜은 손재주가 뛰어나 여러 가지 도구를 발명하기도 하였는데, 나무껍질을 비롯해 삼베와 낡은 천 등을 이용해 종이를 만들었다(105년). 이것이 바로 '채후지'였다.

송나라의 환관 가헌은 수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황제구장산경상해》와 《석쇄산서》라는 저작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고대의 역사서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도 환관이었다. 알다시피 그는 한무제의 미움을 사, 궁형(宮刑)을 당하고는 환관이 되었다. 사마천은 극심한 모욕과 수치를 감내하고 마침내 불후의 업적을 남겨, 후세로부터 끝없는 존경을 받는다.

출신도 역할도 다채로운 동아시아의 환관

당연한 일이지만 환관은 친혈육을 남기지 못했다. 수십 수백 명의 존비속으로 둘러싸인 사대부에 비하면, 환관은 단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문에 중국의 황제들은 사대부보다는 환관을 더욱 신뢰하였다. 베트남의 역사에도 비슷한 경향이 목격된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환관과 사대부들의 반목과 갈등이 심했다.

유능하고 충성스런 환관이 많았으나, 사대부들에 의해 그들의 역할이 왜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엄밀히 말해, 환관 중에는 황제의 이익을 위해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와 달리 사대부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더욱 철저했다. 양자의 충돌은 피치 못할 일이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환관을 고를 때, 선천적으로 성기에 이상이 있는 10세 전후의 아이들을 심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사마천처럼 거세형을 받은 사람 중에서 환관을 선발했다. 특히 진나라와 한나라 때 이런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중국 남쪽 지방의 소수민족 가운데서 환관을 골랐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중국인(한족)과 주위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 환관을 뽑았다. 원나라는 세계제국이었던 만큼 환관의 선발범위도 가히 세계적이었다. 서양사람, 인도사람, 중국, 한국사람이 모두 환관으로 활동했다. 그 전통은 명나라에 이어졌다. 명나라 궁궐에도 몽골출신을 비롯해, 한국(1435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중앙아시아, 타일랜드 및 오키나와 출신의 환관이 뒤섞여 있었다.

명나라 말기, 중국의 환관 수는 7만 명이었다. 그들은 방방곡곡에 배치되어 다양한 업무를 관장했다. 대궐 안에는 일부 환관들이 남았다. 환관의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무려 10만 명을 헤아렸다.

명나라의 환관들은 국가의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당시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였는데, 흉악한 존재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환관은 백성을 쥐어짜 세금을 멋대로 갈취하고, 인육을 먹는가 하면, 변태적 성행위를 일삼는 사악한 존재라고 하였다. 이것은 턱없이 부풀려진 내용이었으나, 일정한 역사적 함의를 내포하였다. 환관은 부패 권력의 상징이었다.

환관의 횡포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크게 일어났다. 청 왕조는 환관의 수를 계속해 줄였다. 말기에는 환관의 수가 2천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들의 권력은 아직도 대단했다. 많은 평민들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거세의 고통을 무릅쓰고 환관을 자원하였으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아마 고려 때부터 환관을 제도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환관은 결혼도 했고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명나라와는 다른 점이었다. 거세를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고환만 잘라내는 경우가 많아, 결혼한 뒤에도 성생활이 가능했다는 의견이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궐 안에는 140명쯤의 내시가 다양한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수자가 아니다. 실학자 이익의 기술에 따르면, 조선 후기 우리 조정에는 환관이 3백 35명, 궁녀가 6백 84명이며, 이들이 받는 녹을 합치면 쌀 1만 1천 4백 30석이라고 하였다(성호사설, 제24권, <환관궁녀>. 환관에게는 정치적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였던 만큼 유교경전에 관한 시험을 매달 치렀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내시의 수명은 대략 70세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평민보다 10여 세나 긴 것이었다. 그런데 무조건 믿고 따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젊은 시절, 질병으로 희생된 환관도 적지 않았을 것인 데다, 궁중의 폭력에 노출되어 절명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한국의 환관은 체격도 훌륭했고, 목소리도 남자다웠다. 그 언행에도 위엄이 있었다고 하는데, 궐내의 건물을 보수하는 등 육체노동을 너끈히 감당할 정도였다.

※출처: 백승종, <상속의 역사>(사우, 2018)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저작권자 © 전북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