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관리들의 주먹다짐
개명(開明) 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마는 권력이 법 위에 있고 보면 폭력이 난무한다. 심지어 예(禮)를 숭상했다는 조선왕조의 고관대작들도 주먹다짐을 했다. 물론 두들겨 맞는 쪽은 대개 하급관리였다.
아직 개국 초기였던 정종(定宗, 재위 1398-1400) 때 일이었다. 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 최운해(崔雲海, 1347-1404)와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 송제대(宋齊岱, 미상)는 중국 명나라의 수도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귀로에 지나는 고을마다 융숭한 접대를 받았다. 그러나 경기도 서원군(현 파주)에 도착했을 때 접대가 기대에 못 미쳤다. 사신일행은 그 일로 군수(郡守) 박희무(朴希茂, 미상)를 추궁하다가 못해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 박희무는 사신들을 즉각 사헌부에 고발했다.
진상조사에 착수한 사헌부는 상관인 최운해는 귀양 보내되, 송제대는 정상이 참작되므로 무죄방면하자고 주장했다. 최운해로 말하면 고려말 조선 초기에 왜구의 토벌에 공이 많아 이름이 높았다.
훗날 세종 때 북방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을 개척한 최윤덕(崔潤德, 1376-1445) 장군은 바로 최운해의 아들이었다. 최씨 부자는 이름난 명신이었지만 그야 어찌됐든, 하급관원을 폭행한 죄로 최운해는 경기도 음죽(현 이천)으로 유배됐다.
그러나 송제대는 일단 무사했다. 그는 당시 조정의 실권자였던 세제(世弟) 이방원(태종)과 특수 관계였다. 정확히 말해, 송제대는 이방원의 처외삼촌이었다. 이방원의 장인은 민제(閔霽, 1339-1408)였는데 그 부인이 송씨였다. 송씨 부인의 오빠가 곧 송제대였다. 권력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던 사헌부 관리들은 이방원의 눈치를 살피느라, 사실을 왜곡해가며 송제대의 무죄를 강변했다.
그래도 문하부(門下府, 사간원의 전신)는 달랐다. 그들은 사헌부의 이를 테면 복지안동(伏地眼動)하는 비겁한 처사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헌부의 동료들을 야유하며 권세에 아부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태를 지켜보던 이방원은 속마음이야 어찌됐든 조정의 기강을 세워야 될 판이었다. 능수능란한 정치가 이방원이 아니던가. 그는, ‘그래도 조정에 쓸 만한 사람이 있다’며 껄껄 웃었다. 결국 송제대와 최운해 두 사람 모두 귀양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실권자 이방원은 사적인 친소관계보다 국가 기강을 중시했던 셈이다. 역사의 기록을 읽어보면 왕이 된 다음의 태종은 공적 기강을 바로 잡는데 다른 왕들보다 열심이었던 것 같다. 왕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관리들의 비리와 월권행위를 엄단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실은 조선의 국법이기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법대로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태종이 나랏일에 애쓴 덕분에 세종과 같은 현군(賢君)이 등장할 수 있었다.
사회기강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조선왕조 일대를 놓고 볼 때 기강이 제대로 섰던 적은 오히려 드물었다. 가령 광해군(光海君, 재위) 때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났다.
당시 좌승지 이위경(李偉卿, 1586-1623)과 상관인 도승지 유경종(柳慶宗, 1565-1623) 집안이 심하게 다투었다. 유경종은 광해군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아뢰었다. 그에 따르면, 대강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1620년 12월 28일, 좌승지 이위경의 여종들이 도승지 유경종의 집에 들이닥쳤다. 이위경 쪽 사람들은 유경종의 열 살 난 손자아이를 폭행했고, 유경종의 아내와 며느리에게도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 당시 유경종은 관가에서 근무하느라 집안에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소 한 마리에 있었다고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유경종의 집 건너편에 부수(副率, 정7품) 황길남(黃吉男)이 살았는데, 이 집과 이위경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이위경 집안에서는 황길남의 종이 소를 훔쳐갔다고 믿었다. 그러던 참에 그가 마침 땔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이위경의 집 근처를 지나게 됐다. 이위경의 종들은 황길남의 종을 소도둑으로 몰아 심하게 매질했다. 그리고는 포도군관을 통해 황길남의 집에 매어있던 소를 끌어갔다. 이것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이위경은 여종들을 황길남의 집으로 보내, 침실에 있던 황길남의 처를 밖으로 끌어내고 치마와 버선까지 벗겨갔다.(『광해군일기』)
이위경의 종들은 그쯤에서 폭력을 멈추지 않고 길 건너편에 있던 도승지 유경종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거기서 어떤 짓을 했는가는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째서 이위경의 종들이 주인의 상관인 유경종의 집에 몰려가서 난동을 부렸는지, 그 이유를 기록하지 않았다. 두 집안 사이에 숙감이 없었다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만으로 보면, 이위경의 종들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폭력 사건이었다. 하지만 상전인 이위경의 지시가 없었더라면, 그들이 양반인 황길남의 처를 폭행하고, 또 도승지 유경종의 아내와 며느리 및 손자를 대상으로 심한 폭언과 폭행을 자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맥락으로 보아 이 사건은 좌승지 이위경이 사주한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이위경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그런데 광해군은 이위경을 엄벌을 할 뜻이 없었다. 결국 흐지부지 사건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앞서 살핀 태종의 귀양조치와는 사뭇 달랐다. 이러고서도 광해군의 조정에 기강이 제대로 서기를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광해군은 왜 유경종의 설명을 듣고도 이위경을 처벌하지 않았을까. 유경종이나 이위경은 모두 집권층인 북인(北人)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위경은 실권자인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의 심복으로서,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시해하려고까지 하였던 사람이다. 이래저래 광해군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이위경의 잘못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1970-80년대의 이른바 군사독재 시절에도 공직사회에서 폭력이 난무했다. 그때는 상관이 부하들을 함부로 다루는 일이 많았다. 군화발로 걷어차고 지휘봉으로 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기업체에서도 상관이 부하를 폭행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1990년대가 되자 나는 이제 그런 시절은 다 지났나 보다 하고 지레짐작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2008년 이후(이명박 집권기) 민주화가 점차 쇠퇴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직사회 곳곳에서도 폭력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합법적 교원단체인 전교조에 대한 과도한 탄압으로 진즉부터 악명이 높던 경기도 평택의 어느 사립학교만 해도 그러했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2009년 구설수에 올랐다. 문제의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교사들을 매질했다.
우리사회의 학교 폭력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학생들이 교사를 폭행하기도 하고, 국립특수학교 교사들이 상습적으로 장애 학생들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해온 사실이 드러나 말썽이 되기도 한다.
노동자와 시민을 상대로 한 진압경찰과 용역깡패의 폭력도 도를 넘은지 오래다. 떠올리기도 싫은 2009년 ‘용산참사’와 평택 쌍용차 사태가 절로 떠오른다(역시 이명박 시절).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시대로의 회귀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차라리 쓸데없는 기우(杞憂)였으면 좋겠다.
사족: 이명박과 박근혜 대통령 시절은 확실히 권위적이었지요. 그 시절에는 폭력이 도처에서 난무하였습니다. 주먹다짐은 국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지금은 아마 그런 일을 기억하는 시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마는, 다시 이명박과 박근혜의 후예들이 집권하면 어떻게 될까요. 권위주의와 편법의 시대로 직행할 것입니다.
그에 관하여 저는 한 점의 의혹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논리의 힘이 아니라 권력의 힘, 합리적 타협이 아니라 물리적 힘으로 몰아붙이는 데 너무도 익숙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때문에 그 자신 또는 일가 친척이 투기로 떼돈을 벌어도 그것은 늘 "정상적 거래"요, 반대편이 어느 무명 대학의 "표창장" 하나를 받았다면 그것은 전국을 열 번 스무 번 뒤집어 놓을 희대의 비리사건으로 둔갑시키고 말지요.
시민의 마음이 어두우면 아무 것도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산 집 값은 올라야 하고, 남이 산 것은 떨어져야 직성이 풀린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봅니다. 값이 오르면 올랐다고, 내리면 당장에 경제가 망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이른바 "언론"에 부화뇌동한다면 아직 멀었어요.
역사에 완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멀고 힘든 길을 오늘도 내일도 조금씩 걸어가는 거겠지요. 모두가 눈을 뜰 때까지 우리는 바로 갈 수 있는 길도 돌고 또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차마 버리고 갈 수가 없으니까요.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