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명언 에세이'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땐 맞장구를 쳐주라”
아 사람들이 남의 말을 듣지 않는구나! 그렇게 느낄 때가 많다. 특히 정치적 논쟁에서 그렇다. 어떤 주장에 대해 열심히 비판을 하는데, 그냥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편의 주장에 이미 답이 들어있는데도 그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마이 웨이’로만 내달린다. “너의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넌 무조건 맞아야 해”라는 강렬한 의지만 돋보일 뿐이다.
글이건 말이건 다를 게 없다. 독일 시인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한쪽의 말만 들어선 알 수 없다. 양쪽의 말을 다 경청해야 한다”고 했지만, 어느 한쪽의 입장을 정한 사람에겐 그렇게 할 마음도 시간도 없다. 그러니 소통이 가능할 리 없다. 이미 2500년 전부터 이런 개탄이 나왔으니, 원래 우리 인간이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걸로 이해하면 조금 위안이 될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0-500)의 말이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주도한 교육법의 핵심 원칙이었다. 피타고라스는 경청(傾聽)을 진리 획득의 조건으로 보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5년간 수업시간 중에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경청의 기술만을 발달시키는 교육규칙을 지켜야 했다고 한다. 로마시대 철학자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20)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교 교육을 마친 후에도 성인 생활 내내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인간의 귀는 둘인데 입은 하나인 이유는 말하는 것만큼의 두 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os, 55-135)의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의 귀는 둘인데 입은 하나인 이유는 많이 들으라는 뜻이다”로 변용돼 사용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경청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경청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노력을 싫어하니, 경청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워낙 경청을 하지 않다보니 경청은 좋은 처세술의 덕목이 되기도 한다. 미국 교육자 찰스 엘리엇(Charles W. Eliot, 1834–1926)은 “성공적인 사업 상담에 대한 비법은 없다. 당신에게 말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보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미국 작가 잭 우드포드(Jack Woodford, 1894–1971)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은 은근한 아부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경청의 아부 효과를 심리치료에 도입했다. 미국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 1902-1987)가 심리치료를 위해 사용한 ‘거울요법(mirroring)’의 핵심 규칙은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땐 맞장구를 쳐주라”이다.
예컨대 상담자가 “오늘은 기분이 아주 개떡같아요”라고 말했다면, 치료자는 이를 받아 “아, 오늘은 상당히 기분이 나쁘신가 봐요”라는 식으로 함께 공감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로저스는 은밀한 고백까지 들어주는 경청 능력을 가진 이를 ‘성장을 촉진하는 경청자(growth promoting listener)’라고 불렀다.
“좋은 지도자는 좋은 경청자다”
“‘단순한 듣기(청취, hearing)'와 ’귀 기울여 듣기(경청, listening)'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혼란과 불화가 야기된다. 이 두 단어를 바꿔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국 정신분석학자 제임스 보그(James Borg)의 말이다. 보그는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단순히 듣는 행위는 청각기관이 귀를 통해 정보를 두뇌에 전달하는 ‘생리적’ 과정인 반면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은 해석과 이해의 과정을 나타내며, 들은 말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심리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선 “내가 말했잖아!”와 “당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어?”라며 다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청취’와 ‘경청’이라는 두가지 듣기 방식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인 셈이다.
“내가 어떤 문제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 진심으로 듣고 진정으로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의 존재가 세계관을 바꾼다.” 호주 출신의 미국 심리학자 엘튼 메이요(Elton Mayo, 1880-1949)의 말이다. 미국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샘 혼(Sam Horn)은 이 말을 받아 “분노의 대부분은 주의를 기울여달라는 울부짖음이다”고 주장한다.
경청은 기업계에서도 자주 강조되는 덕목이다. 2012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10년 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유망 직업 중의 하나로 ‘최고경청책임자(CLO: Chief Listening Officer)를 선정했다. CLO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고객의 얘기를 듣는 업무를 총괄한다.
“우리는 효과적인 경영자의 8가지 행동을 검토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행동을 추가하겠다. 그 행동은 대단히 중요해서 규칙으로 격상시키겠다. 그것은 ‘먼저 경청하고 나중에 말하라’이다.” 미국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의 말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생각을 갖고 있고, 더 똑똑하고, 더 경험있고, 더 창의적인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모든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 미국 GE 회장을 지낸 잭 웰치(Jack Welch, 1935-2020)의 말이다. 미국 록히드마틴 회장 놈 어거스틴(Norm R. Augustine, 1935-)도 “그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비판을 들었다. 당신은 누군가가 지나치게 경청한다고 비난받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미국 리더십 전문가 존 캘빈 맥스웰(John Calvin Maxwell, 1947-)은 “좋은 지도자는 좋은 경청자다”고 했다. 우리는 지도자라고 하면 주로 하는 일이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하는 지도자는 망하기 십상이다. 들으려 하지 않는 지도자에게 누가 직언이나 충언을 하려고 들겠는가? 지도자는 귀가 커야 한다.
“당신이 관리자라면 ‘미세한 긍정(micro-affirmation)’의 힘을 기억하라.” 미국 언론인 브리짓 슐트(Brigid Schulte, 1962-)의 말이다. 슐트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따뜻한 관심을 표시하고, 관대하게 행동하고, 남들에게 소개를 해주고, 공정하면서도 구체적인 피드백을 적시에 해주는 것은 무의식적 편견에 맞서는 작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다”고 했다.
경청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남의 말에 경청하는 건 굴복이 아니다.” 미국 심리학자 로다 바루크(Rhoda Baruch, 1925-2019)의 말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것은 자존감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남의 말을 경청한다고 해서 포기하고 손해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귀를 기울이고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어 바루크는 “제대로 경청한다는 건 그 말을 들을 뿐 아니라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또 이해하고 있다는 걸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라며 다음과 같은 몇가지 기술적인 요령을 제시한다.
“먼저, 상대방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는 자세를 잡아야 한다. 말하는 사람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눈빛을 교환하면서 집중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오해를 바로잡거나, 질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해도 일단은 억누른다. 인내심이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중에 말할 차례가 왔을 때 하면 된다.”
남의 말에 경청하는 건 굴복이 아니라는 건 가슴에 와닿지만, 경청한다고 해서 포기하고 손해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엔 동의하기 어렵다. 경청은 의외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국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Marshall B. Rosenberg, 1934-2015)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어려움을 경청하는 것은 사실상 ‘많은 말을 하는 것’ 이상이다“고 말한다.
전문 상담사들에게 물어 보라. 경청을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잘 말해줄 것이다. 경청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효과가 있다.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 제대로 경청만 해준다면 그 어떤 조언을 해주지 않더라도 당신은 친구를 이미 도운 것이다. 듣는 도중에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린다거나 딴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친구의 말에 집중만 해주는 것, 그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경청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명한 이해관계가 없는 한 그 일에 전념하지 않는다.” 미국 커뮤니케이션학자 캐롤 로치(Carol A. Roach)와 낸시 와이어트(Nancy J. Wyatt)의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청각적으로 잘 듣기 위해 훈련을 할 필요는 없지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끔 잘 듣기 위해선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분명한 이해관계가 있다면 스스로 훈련을 해낼 것이다. 세계 최대 생활용품 업체 프록터앤드갬블(P&G) 회장 앨런 조지 래플리(Alan George Lafley, 1947-)는 자신이 고액 연봉을 받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청의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이지요. 위로 갈수록 아래 구성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마도 높은 연봉은 이런 괴로움을 잘 견뎌내라고 주는 보상이 아닐까요? 저는 대화 시간의 3분의 2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데 투자합니다.”
서로 안전하게 고백할 수 있는 블랙박스
그렇지만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그런 뚜렷한 이해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미국 심리학자 에이미 커디(Amy Cuddy)는 사람들은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즉각 휩싸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래서 한마디라도 먼저 또 많이 하려 하고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서 자기를 증명하려 한다. 자기가 아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 자기가 성취한 것 등을 자꾸만 들려주려 한다.”
주도권 다툼 때문이라는 이야긴데, 조금만 더 멀리 내다보면 어떨까? 커디는 “발언하고 주장할 수 있는 일시적인 권력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권력을 갖게 되고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는 ‘경청의 역설’을 제시한다. 몇가지 근거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다.
유용한 정보를 얻는다. 사람들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심지어 자신의 협력자로 바라보게 된다. 다른 사람이 기꺼이 받아들을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 사람은 남이 자기 말에 귀 기울인다고 느끼면 자신도 남의 말을 더 경청하려 한다.”
“잘 들어주고 싶다면 상대가 말할 때 아무 말 없이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얼마 동안 욕구를 제쳐둘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미국 철학자 마이클 니콜스(Michael P. Nichols, 1945-)의 말이다. 그는 욕구를 제쳐둔다는 것이 자신을 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화할 때 개성을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상대에게 휘둘려 ‘자아’를 잃어버리고 의무적으로 들어주려 한다. 갈등이나 거절의 두려움, 논쟁, 다른 사람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에 대응하는 것보다 순응하는 편이 더 쉽고 안전하다고 생각한다....고분고분한 사람들은 훌륭한 대화상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단순한 저장소나 스펀지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소극적인 자세는 경청이라고 할 수 없다.”
좋은 말이지만, 늘 그런 식의 고난도 경청을 해가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되니까 말이다. 이건 누구의 말을 경청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상대가 가족이나 친한 친구라면 그런 적극적 경청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고농도의 경청을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발휘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심리학자나 자기계발 전문가들이 ‘경청 등급제’를 만들어, 사람에 따라 차별화를 하라고 요청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내 말을 경청해주는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여행 중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실은 경청의 어려움과 관련이 있을 게다. 여행이라고 하는 특별한 환경은 경청을 쉽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1967-)은 “우리는 서로에게 안전하게 고백할 수 있는 블랙박스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란 당위를 현실로 누리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적 논쟁 등과 같은 사회적 차원의 대화나 토론에서 경청을 기대하는 건 매우 어렵겠지만, 그마저 상대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구나”라고 이해해주면 ‘소통의 죽음’이라고 볼 이유는 없는 셈이다.
모든 소통이 직접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우리 모두 가끔 양 귀를 어루만져보면서 왜 인간의 귀는 둘인데 입은 하나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강준만 전 전북대 신방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