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여느 선비처럼 고봉 기대승도 여러 편의 시에서 매화를 노래하였다. 그 역시 매화를 사랑하였다. <<고봉속집>>(제1권)에 보면, 고봉은 사랑채 앞에 한 그루 매화를 심어놓고 정성스레 가꾸었다. 한겨울 추위에 행여 얼어 죽을까 걱정이 되어 짚으로 싸매기도 하였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봄이 오자 짚을 벗겨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매화는 너무나 시들어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기대승은 깊이 한탄하며 한 편의 시를 읊었다. 어젠가 그의 스승이 도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사랑채 앞 한 그루 매화나무 堂前一樹梅

시들고 파리해 점점이 푸른 이끼 돋았네 憔悴眯蒼苔

흰 눈이 겁나서 공연히 덮어 놓았든가 畏雪空相掩

봄은 왔건마는 살아나지 못하네 逢春更不擡

사람 마음은 정말 흐려지기 쉽다오 人心眞易昧

사물의 본성 어찌 그리 키우기가 어려울까 物性豈難培

문득 생각했다오, 내 고향 강남땅에는 却憶江南地

울타리 가에 무수히 피어났을 것을 籬邊無數開”

과연 성리 철학자다운 시가 아닌가. 1연은 시들어버린 매화나무의 딱한 사정을 사실적으로 기술하였으나, 2연에서는 본성에 관한 철학적 탐구가 시작된다. 겉으로 보면 기대승의 고향인 남쪽 지방(전라도 광주)에는 어디서나 매화꽃이 핀다는 이야기 같아도, 속뜻은 그렇게 간단해 뵈지 않는다.

강남은 주자학이 꽃핀 남송이요, 울타리 가란 그곳에서는 굳이 주자와 정자가 아니라도 선비가 도를 함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리라고 하는 주장이다. 만약 남송에 태어났더라면 자신의 성리학 공부도 한결 수월하였겠다는 말이다. 주자와 정자의 가르침을 더욱 깊고 철저하게 이해하고 싶은 소망을, 고봉은 이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그런 기대승에게 퇴계 이황은 한 줄기 찬연한 빛이었다. 스승을 만나자 세상 모든 것이 싹 달라졌다. 스승과 제자 사이를 오간 수차례 왕복 서한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은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이른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라고 하여, 그들은 인간 본성의 정체를 밝히고 수양의 방법을 깊이 탐색하였다. 스승과 제자는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점차 자신의 단점을 버리고 상대의 장점을 수용하였다. 때는 아직 16세기였으나, 그들은 학문적 토론의 진미를 맛본 것이었다.

매화를 사랑하는 스승, 제자가 왜 그런 사실을 몰랐겠는가. <<고봉속집>>(제1권)에는 <우러러 퇴계 선생의 매화시의 운을 빌려서 짓는다(仰次退溪先生梅花詩)>는 시가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선생은 남몰래 겨울에 피는 매화와 약속하셨다네 先生幽契託寒梅

서울의 풍진 속으로 우연히 홀로 오셨지 京洛風塵偶獨來

돌아가게 되시자 매우 좋아하시는데 봄도 아직 한창이네 歸興浩然春不暮

안타까울 손 성긴 꽃 그림자여, 빨리 시름을 달래 주오 定憐疏影慰摧頹”

스승은 고향에 사랑하는 매화를 두고 홀로 서울에 올라오셨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다시 낙향하게 되셨다. 훌훌 털고 떠나가시며 어찌나 기뻐하시던지. 때는 아직 봄철이라. 매화는 하루가 다르게 시들고 있었으나, 멀지 않아 스승님과 재회할 날이 오리라. 매화의 기쁨, 이것이 제자의 시름이 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기대승은 스승의 속마음을 헤아리며 이 시를 지었을 것이다.

기대승은 고향 안동으로 떠나간 스승을 그리워할 적이 많았다. <<고봉속집>>(제1권)에 <꿈에 퇴계 선생을 뵙다(夢見退溪先生)>는 시 한 수가 있다. “한 번 이별한 후 자주 꿈속에서 (스승님을) 뵈었다. 그런 이유로 그냥 이 절구 한 수를 지어서 (도산으로) 보내드렸다”고 하였다. 이것은 말하자면 한 통의 시 편지이다.

“지난밤 희미한 기억 속에서나 스승님을 모셨습니다 前夜依俙杖屨陪

이 밤에도 정답고 친절하게 웃기도 하시도 말씀도 하셨습니다 今宵款曲笑談開

정녕코 한 생각은 아직도 세상 걱정이셨습니다 分明一念猶憂世

스승님께서는 매화에 매이지 않으신 줄 저는 깨달았습니다 可識先生不著梅”

분명히 그랬을 것이라 믿는다. 어찌 한세상의 사표이신 퇴계 이황 선생이 한갓 매화의 아름다움만을 생각하였을까. 기대승은 이런 시 편지를 쓴 특별한 사연도 빠짐없이 기록해두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스승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도산에 매화가 아직 피지 않았으니, 지금 돌아가면 꽃이 필 때쯤 도착할 것이다.’ 그러자 대승이 이런 말을 하였다. ‘자연에 집착하는 것도 속세(성곽)에 집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 이렇게 우스운 말을 주고받으며 한바탕 웃은 적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지막 구절을 그렇게 마감한 것이다.”

스승의 그리운 얼굴을 어디선가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나에게도 어버이 같은 스승이 계셨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감히 다가가서 여쭐 스승도 없고 꿈에라도 만나고 싶은 제자도 없는 것 같다. 이것이 정녕 슬픈 일이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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