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최제우는 왜, 자꾸만 서양을 의식한 걸까요? 서양을 왜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요?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 문제 역시 『동경대전』에 잘 나와 있어요. 동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저는 그 점을 특별히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아래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최제우는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일어난 엄청난 정치적 재앙을 언급했습니다. 사실 1860년에 큰 재앙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2차 중영전쟁이었습니다.
1839년에 시작해 1842년에 끝난 제1차 중영전쟁은 이미 1840년대 초반에 있었고요. 제2차 전쟁은 1856년에 일어나서 4년 뒤에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아편전쟁’이었어요.
아편전쟁으로 중국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반(半)식민지 상태가 되고 말았어요.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세계의 최강국이요, 최대의 문명국가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중국이 영국에게 무참히 패배한 것입니다.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사실상 베이징의 코앞까지 진격하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톈진(天津)까지 빼앗긴 청나라는 침략군에게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어주었습니다. 중국 전체가 서양 세력에게 끔찍한 굴욕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은 촉각을 곤두세웠어요. 시시각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그 당시 조선과 청나라 사이를 한 해에도 두어 차례씩 사신이 오갔습니다. 조선에서는 중국이 움직이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아편전쟁으로 놀란 것은 중국만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지요. 일본도, 한국도 다 깜짝 놀랐습니다.
충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1860년에는 서울에서도 피난민이 발생했답니다. 무슨 피난민이냐고요? 서양 세력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올까 봐 서울을 황급히 떠나가는 그런 피난민의 행렬이 이어졌대요. 서양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중국의 패망에 관한 소식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두려움이 사실 근거 없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1830년대부터서는 우리나라 남해안과 서해안에는 서양의 대형 선박들이 빈번하게 출현했습니다. 서양의 시커먼 증기선들이 출몰할 때 그것을 목격한 조선 어부들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낯선 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물론 오래 전이었어요. 18세기에도 이른바 ‘이양선(異樣船)’, 그러니까 우리 배와 모양이 다른 배들이 가끔씩 목격되었어요. 그러나 19세기의 증기선은 과거의 배들과는 수준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배들은 더욱 규모가 커졌고 빨라졌으며 무장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요. 이양선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심은 나날이 증폭되었어요.
게다가 또 다른 흉흉한 일들이 벌어졌어요. 이미 18세기 말부터 서서히 밀어닥친 또 다른 공포의 물결이 있었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말씀이지요. 전국의 소들이 구제역에 걸려 쓰러진 거였어요. 구제역은 러시아를 통해서 들어온 거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정착사회를 이루어 한 곳에 붙박이로 살아온 거잖아요. 말하자면 토착화된 거란 말이죠. 그래서 면역 체계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어요. 갑자기 외부로부터 들어온 낯선 질병에 취약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서양 세력이 팽창하여 지구 곳곳으로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16세기 대항해시대부터 생긴 일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국을 떠나 세계 각지로 퍼져감에 따라 새로운 질병이 지구 전체로 확대되었습니다. 큰 재앙이었습니다. 가령 18세기 말 조선에 구제역이 퍼져서 전국이 공포에 빠졌어요. 이것도 알고 보면, 러시아가 세력을 확장하여 연해주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갑작스런 인구 이동으로 전염병의 습격을 가장 먼저 겪은 것은 남아메리카였어요. 16세기의 일이었지요. 그곳에는 본래 수천만 명을 헤아리는 원주민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원정대가 들어온 뒤로 불과 수십 년 만에 없어졌습니까? 원주민이 거의 멸종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유럽인들이 자신도 몰래 들여온 각종 전염병균 때문이었어요.
알다시피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가축이란 존재가 없었단 말예요.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오래 전부터 가축을 키웠고, 때문에 가축으로부터 많은 질병이 생겼어요. 가령 지금도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는 폐결핵, 성홍열, 티푸스 등은 본래 가축의 질병이었어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라시아의 인류는 이러한 질병에 대처할 면역체를 다소나마 몸에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렇지를 못 했어요. 때문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진출하자 아메리카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말았어요. 이렇듯, 인구의 이동은 질병의 전염이란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같은 이치로, 18~19세기에 서양 사람들이 동아시아 곳곳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자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새로운 질병들이 많은 나타났어요. 중국에도 신종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어요. 일본에도, 한국에도, 그 밖의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전염병의 쓰나미가 닥쳤습니다. 아시아 사람들은 그런 전염병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당시로서는 사실상 전혀 없었어요.
외부의 영향으로 전염병이 퍼진 것은 사실 우리가 짐작한 것보다 일찌감치 시작되었어요. 제가 관심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이미 조선 숙종 때부터 문제가 심각했어요. 조선 숙종 때라면 17세기 후반입니다. 그때 정체불명의 인플루엔자, 즉 독감에 걸려서 죽는 사람이 많았어요. 어느 한 해에는 1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독감은 물론 서양 사람들이 가져온 독감이었습니다. 서양 선원들이 보균자였어요. 그들을 통해서 독감이 일본으로, 중국으로 퍼졌고요. 이것이 조선으로 넘어온 거예요. 우리는 그걸 막을 수가 없었어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또 다른 전염병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어요. 서양 사람들이 가져온 가장 흉악한 전염병은 콜레라였어요. 본래 인도의 풍토병이었다고 하지요. 이 콜레라는 18세기까지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적이 전혀 없었거든요. 콜레라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인데, 서양 사람들이 나타나자 이런 병이 퍼진 겁니다.
최제우는 그런 변화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꼈어요. “아! 이 서양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니까 온갖 변고가 다 나타나는구나. 없었던 질병이 나타나고, 흉년이 심해지고, 이상한 일들이 많이 생기는구나. 그래서 중국이 거의 멸망 지경에 이르렀구나.” 최제우는 이처럼 복합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서양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을 가졌어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앞장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졌어요. 그래서 최제우는 자기 나름으로는 서양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를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문제를 종합적으로, 궁극적으로 풀어갈 방법을 찾아 나섰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840년대 중반부터 최제우는 약 15년에 걸쳐서 정신적 방황을 했습니다. 제2차 중영전쟁이 끝난 1860년까지 말이지요. 그는 각지를 방황하면서 많은 체험을 했고, 여러 가지 전통적 지혜를 탐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대책을 강구하여 동학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활동의 저변에 서구의 충격이 있었어요.
엄청난 서구의 충격이 최제우에게 새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때 충격을 받고 대안을 세우고자 동분서주한 이가 어찌 최제우 한 사람뿐이었겠어요? 움직인 사람은 많았을 테지요.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결실을 맺은 이가 바로 최제우였던 것이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15년 동안의 방황 속에서 최제우는 동서양에 관한 별별 지식과 생각을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마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길고 어두운 모색의 기간이 있었기에 남다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백승종,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들녘, 2019)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에 나온 책입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