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교보문고에는 SAM이란 전자책 대여 서비스가 있다. 책을 읽어 보고 소장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 유용하게 쓰는데, "쌤통북통"이라고 책 서너권을 묶어 한 권처럼 제공하기도 한다.
자기계발서, 경영서, 그저그런 에세이류나 심리책이 많아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소설이 올라오면 너무 고맙게 읽는다. 한때는 소설을 꽤 읽었다. 이제는 주로 출간을 염두에 두고 영어로 된 책을 읽느라 시간이 모자라 한글책은 자연히 의학과 관련 있는 것들을 읽게 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소설은 시대를 예민하게 반영한다. 나라를 떠나 산 지 10년이 넘으니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낯설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알 길이 없다. 소설 읽는 시간이 귀한 이유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뭔가를 가르쳐야 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무를 벗어던진 소설은 얼마나 다채롭고 신선한지!
1월부터 이런저런 일로 작업 능률이 크게 떨어지고 피로를 쉽게 느껴 일찍 자리에 누워 잠이 올 때까지 소설을 읽었다. 이제는 읽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감탄하며 읽었던 때의 정서나 깨달음은 물론, 그토록 귀중한 시간을 선사해준 분들의 이름과 책 제목까지 잊어버리니 안타까울 뿐이다. 나중에라도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적어본다. 모두 한겨레출판의 책들이다.
마르타의 일(박서련) - 동기간경쟁(sibling rivalry), SNS 시대와 온갖 폐해, 청년들의 각박한 현실, 남성의 성착취 등 굵직한 주제에 성경에 대한 깊은 해석, 동성애 등의 요소를 맛깔나게 버무렸다. 역시 영화를 방불케 하는 재미있는 줄거리에 탄탄한 문체. 감탄하며 읽었다.
체공녀 강주룡(박서련) - 같은 작가인 줄 몰랐다. 일제시대를 당차게 살아냈던 한 여성이 노동자의 권리에 눈뜨는 과정이 생생하면서도 정감있게 펼쳐진다. 평안도 사투리를 어떻게 이토록 제대로 재현했는지 기가 막히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최진영) - 기막히게 비참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글로는 으뜸이다. 책장마다 시처럼 아름다운 문구들이 펄럭인다. 그런 문구들이 온갖 상욕과 어우러지는 강렬한 대비라니! 버림 받은 한 소녀가 '진짜 엄마'라는 붙잡을 수 없는 이상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 이야기인데, 초반부에는 펠리니의 <길>처럼 오래된 영화나 옛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지만, 뒤로 갈수록 현실적이고 삭막하며 끝없는 절망이 펼쳐진다. 희망 따위는 없다. 몰입해서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 사는 세상이 이토록 잔인했던가!
표백(장강명) - 한때 사람은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사는 것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언뜻 황당한 이런 생각을 모티프로 현재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이어진다. '진정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뿐이다"라는 까뮈의 말을 떠올리며 읽었다. 뒤로 가면서 추진력이 떨어지고, 제2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은 조금 억지스럽기도 한데 알려진 대로 작가의 문체가 워낙 흡인력이 강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근린생활자(배지영) - 여섯 꼭지의 중단편 모음집. 모두 탁월하다. '사마리아 여인들'을 읽으면서 잠깐 울었다. 다만 '그것'에서 보여주는 뭐랄까, 진보적, 환경주의적 시각이 비과학과 결합하는 부분이 약간 우려스럽다.
특별관리대상자(주원규) -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는데 의미는 모르겠다. <메이드 인 강남>도 그랬고 현실과 괴리된 느낌. 문체도 단단하지 않다.
9번의 일(김혜진) - 자본이 평범하고 선량한 노동자를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노동소설이 여전히 유효함을 일깨운달까. 건강성과 무모함이 결합된 마지막 장면에서 80년대 민중문학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누운 배(이혁진) - 현장을 겪은 직접 경험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는 작품. 작가는 애써 소설임을 강조하지만, 나는 기록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만큼 우수한 기록문학은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금융위기 때 조선업이라는 특수한 주제를 다루지만 꿈을 좇아 건강한 노동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와 자본-착취-회사정치라는 비열한 현실 사이의 긴장은 후기산업사회의 영원한 테마이기에 전혀 낮설지 않다.
다른 사람(강화길) - 여성학과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노라면 항상 이렇게 밖에 못 쓰나 혀를 차곤 했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페미니즘 책 10권보다 이 소설 한 권이 낫다. 끈질기게 파고들어, 날카롭게 구분짓고 드러낸다. 오래도록 의구심을 갖던 부분이 이해되면서 설득당했다.
/강병철(소아과 전문의·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