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의 '역사칼럼'

이황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가 길이 기억하는 대학자이다. 그가 이룬 학문적 성과는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의 에도시대에도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고, 또 그가 키운 제자들은 나라가 의지할 기둥이요 들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의 성리학설을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를 매화의 시인으로서 만나보려 한다.

<<퇴계선생문집>>(제4권)에는 어느 해던가, 3월 13일 도산에서 쓴 매화시가 보인다. 이황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매화가 추위에 상한 것이 지난해보다 심하다. 움 속의 대나무도 여위고 파리하였다. 지난봄에 읊은 율시의 운을 빌려 내 소감을 적어둔다. 그때 나는 정진보(鄭眞寶, 정유일)와도 약속이 있었다.”

도산에서 제자 정유일과 만났을 때, 스승과 제자는 매화의 안부를 걱정하며 한동안 대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이황은 그 사정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평탄하고 사실적이어서 구태여 설명을 붙일 필요도 없겠다.

“아침나절 산북에서 봄을 찾아왔네 朝從山北訪春來

눈에 들어오는 산꽃, 비단 더미처럼 아름다워라 入眼山花爛錦堆

시험 삼아 대나무 햇순 헤쳐 보다가 파리해 놀랐네 試發竹叢驚獨悴

문득 매화나무 잡아당기며 늦게 핌을 한탄하오 旋攀梅樹歎遲開

성긴 꽃송이 또 바람에 뒤집혀 흔들린다오 疎英更被風顚簸

애써 지킨 절개, 모진 비 거듭되자 꺾이고 말았나 苦節重遭雨惡摧

작년에 만난 친구들 오늘은 소식도 끊겼네 去歲同人今又阻

맑은 시름 여전하여 참기 힘드오 淸愁依舊浩難裁”

이렇게 쓴 다음, 이황은 한 줄을 보탰다.

“이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얼핏 범연해보이는 이 한 문장이 내 가슴을 찌른다. 날씨와 경치를 말하는 것 같지만 중의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가 “맑은 시름”을 꺼낸 것도 그렇고, “작년에 만난 친구들”과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고 탄식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것은 매화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모진 비바람에 꺾인 절개라는 것도 한낱 식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퇴계 이황이 들려주는 내면의 고백으로 읽어야 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온 것은 그날의 일기이면서도 이황이 몸담았던 조정의 형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매화를 보고 싶다고 그가 말하는 것이며, 제때 피지 못하는 꽃을 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매화는 곧 퇴계 자신이었다.

이황이 쓴 매화시는 다양하였다. 때로 그는 기쁨에 넘쳐 매화의 어여쁨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제4권)을 읽나가, 나는 1567년(명종 22) 답청일(踏靑日) 곧 삼월 삼짓날 읊은 시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황은 병상에서 일어나 홀로 도산으로 올라갔다. 그때도 산에는 두견화와 살구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그러나 이황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매화였다.

“작은 매화나무 한 그루, 그 가지에 하얀 눈처럼 뭉쳐있는 하얀 꽃이 피었다. 몹시 어여뻤다.”

이황은 매화를 다시 만난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하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도산에 오지도 못하고 한 해가 벌써 흘렀네 不到陶山歲已更

산 바위는 주인도 없이 봄빛이 절로 밝았네 山巖無主自春明

천 가지 꽃, 가마에 오르자마자 흥겹기 그지없어라 千紅喜我初乘興

한그루 하얀 매화여, 그대 늦게 피었어도 사랑하노라 一白憐君晩有情

앓다 일어났는데도 외려 아름다운 꽃 봄 즐기네 病起尙耽芳節好

읊조리다 깨달았네, 낮 바람의 부드러움 吟餘更覺午風輕

유유히 또 강가 정자 향해 앉았네 悠然又向江臺坐

올려보고 내려다보니 감개가 절로 생기오 俯仰乾坤感慨生

하늘 기운 꽃다워도 봄날 더디 오네 雲物芳姸麗景遲

화창한 봄 풍경 시야에 가득한 3월이라 韶華滿眼暮春時

도잠은 술을 끊었다 다시 술을 생각했다오 陶公止酒還思酒

두보는 시 읊지 말라 했으나 다시 시를 읊조렸네 杜老懲詩更詠詩

땅 뒤덮은 푸른 풀, 천 가지 초목 어지러워라 蓋地翠茵千卉亂

온 산에 붉은 융단, 만 가지 꽃이 펼쳐졌네 漫山紅罽萬花披

내 평생 싫어한 것은 어지럽고 화려한 일 平生苦厭紛華事

모두 버리고 옥설(매화) 가지에 의지하려네 壓掃全憑玉雪枝”

이 시를 썼을 때가 언제이던가. 이황은 벼슬을 버리고 도산에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매화 가지 하나에 삶을 의지하고 싶다고 쓸쓸하게 말하였다. 이해관계와 온갖 탐욕으로 얼룩진 조정을 벗어나 자연을 벗 삼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새기고 싶었던 것이다. 매화는 그에게 자연의 너그러운 품이요, 덕(德)스런 인간 본성의 회복이었다. 구원의 약속이었다.

대학자의 매화 사랑, 거기에는 또 다른 특별함도 있었다. 이황은 매화에서 신선 세계의 자취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퇴계선생문집>>(제5권)에 <계재(溪齋)에서 밤에 일어나 달을 마주하고 매화를 읊다>란 시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재’란 무엇일까. 도산 계곡에 새로 지은 그의 도량, 학문과 휴식의 공간이었다.

한밤에 깨어 달빛에 어린 매화를 바라보며 그는 이런 생각을 하였단다.

“(서왕모가 살던) 군옥산 꼭대기 첫손가락에 꼽히는 신선이로다 群玉山頭第一仙

투명한 얼음 살결 눈빛 꽃이여 꿈속에도 아름다웠소 氷肌雪色夢娟娟

일어나 달빛 아래서 서로 만난 이곳에서 起來月下相逢處

영락없는 신선 풍모, 참으로 빛나네 宛帶仙風一粲然”

정녕 그러했다. 매화는 퇴계 자신의 모습이요, 그의 지향점이요, 또한 인간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 신선이었다. 매화는 이황에게 영원을 향한 그리움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매화를 떠나서는 숨을 쉴 수 없는 시인이 되었다. 그런 그여서 인생을 마감하던 순간에 그는 이렇게 유언하였다고 한다.

“신축일 유시, 정침(제사를 모시는 몸채의 방)에서 눈을 감으시다. 이날 아침, 선생은 모시고 있는 사람더러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유시 초가 되자 드러누웠던 자리를 걷게 하시고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채로 평안히 운명하였다.”(<<퇴계선생연보>>, 제2권)

경오년(1570, 선조 3) 12월이었다. 향년은 70세였다. 그가 앉아서 운명하였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날 아침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부탁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왤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황은 매화를 그토록 깊이 생각하였던 것일까.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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